고대시대, 광고와 PR의 탄생

문자의 발생과 최초의 PR

문자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문자가 없던 시절에서도 정보는 말로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문자가 없었다면 인류의 지식과 생활들이 작성되어 전달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은 목구멍을 통하여 나타나는 소리인데 그 장소 그 시간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성을 지녔습니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서도 정보는 말로서 전해졌습니다. 입으로 내는 소리는 북을 두드리는 등의 행위로 발전하였다.현재에도 언어가 없는 아프리카의 오지에서는 말을 통해 정보와 지식이 전달됩니다. 인류의 최소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는 소리였다는 점을 되새기며 어떻게 고대시대에 어떻게 광고와 PR이 탄생되었는지에 대해 탐험해보겠습니다.

인간이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문자는 B.C. 4000년대에서 B.C. 3000연대 초기로 추정되는 시기의 수메르(Sumer) 인의 설형문자와 이집트인의 상형문자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문자들을 사용하여 정보와 지식을 누군가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수메르와 이집트는 기원전 4000년경에 사회적 관계와 농업과 교역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당시의 문자 기록들은 정치적인 선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유럽의 여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설형문자로 된 비석이나 기념비에는 B.C. 2500년대부터 수메르의 많은 국왕들이 신전을 세우거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그 내용을 새겨 놓은 것이 많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목적에서 기념비를 세웠지만 나중에는 국왕의 업적을 알리기 위한 선전과 홍보의 성격이 강해졌습니다.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한 기록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아들 카이사리온에 대한 기록

팻말에서 오벨리스크까지

고대시대의 선전의 방식으로 사용된 것들로는 팻말과 오벨리스크들을 들 수 있으며 문서로서 발견되는 것들로는 상업문서를 들 수 있습니다.

팻말(Sign) : 국왕이 각 지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세운 경계선 팻말은 공고판이나 각종 팻말의 시작이었다. 고대의 도시들은 주로 수로 경계석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바벨론 왕이 손에 활을 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경계석이 있습니다. 바빌론은 현재 이라크 지역으로 기원전 612년경에 융성했던 국가입니다. 팻말에는 종교적 의미의 메시지나 국왕을 신화화하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수메르의 유적의 돌기둥에 있는 설형문자

수메르의 유적의 돌기둥에 있는 설형문자

오벨리스크(Obelisk) : 국왕의 공덕이나 위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의 거대한 석재에 갖가지 글이나 그림을 그려놓은 기념탑을 오벨리스트라고 합니다. 오벨리스크 그림처럼 궁전 벽에 그려진 국왕 홍보 그림을 포스터의 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상업 문서 : 바빌로니아(Babylonia)나 앗시리아(Assyria)에서는 토지나 가옥을 임대하고 매매할 때 당사자가 계약 내용을 새긴 점토판으로 만든 계약서를 가지고 그들이 거주하는 지방의 사제나 법률 종사자에게 찾아가 복사판을 만들어 한 부는 보관하고 각각 한 부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페니키아(Phoenicia)와 알파벳의 등장

이집트에서 모세의 출애굽기를 통해 가나안 지역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페니키아인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북쪽 지역은 기후가 건조하기 때문에 농사와 목축에 적합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페니키아 사람들은 바닷가로 배를 끌고 나가 지중해를 항해하면서 상인이 되었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주로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에 종사했으며, 발굴 자료에 따르면 이집트 제 4왕조(B.C. 2613 ~ B.C. 2494 추정) 때부터 이집트와 비블로스(Byblos) 간의 상업 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B.C. 1200~900년 경에 융성했으며, 상품을 만들고 교역하는 일에 능하여 공예품 원료인 향료 등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일찍 알지 못하던 먼 나라를 항해하였다. 무역과 상업에 능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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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 알파벳

이 과정을 통해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스스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의 사이프러스, 코카서스, 사르디니아, 이베리아 반도 등을 식민지화 한 것은 물론이며,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서안과 동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페니키아인의 상점은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서 지중해 연안의 각종 정보가 모이고 흩어지는 근거지의 역할도 하였다. 해상 교역과 문화 전파를 통한 페니키아의 전성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오늘날 알파벳의 모태가 되는 페니키아어 알파벳이 발명되었다. 이 B.C. 2000년대 중기부터 알파벳은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에상되는 고대의 범선 벽화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에상되는 고대의 범선 벽화

카르타고의 샌드위치맨(sandwich man)과 호객꾼의 등장

제임스 우드(James Playsted Wood)는 샌드위치맨은 카르타고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카리선의 선주는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선원에게 배가 도착할 것과 배에 실린 상품의 내용을 적은 셔츠를 입혀 길거리를 돌아다니게 했다”며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인들의 주된 시장이었던 시대에는 각 상점마다 고객을 소리쳐 끌어들이는 호객인들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Wood, 1958 ).

카르타고(Carthago)는 현재 튀니지 일대로서, 페니키아 인들이 카르타고와 지중해 그리고 지금의 스페인 남부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에 면해 있으면서 동시에 육지에 비옥한 경작지를 소유한 탓에 농업에 종사한 가문들과 상업에 종사한 가문들 사이에서 갈등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상업 중심파가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지중해 서부 헤게모니를 확립시키기에 이릅니다. 기원전 6세기 초반, 항해자 한노(Hanno II of Carthage)가 아프리카 해안가까지 항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시에라리온에까지 도달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5세기 초반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일대의 교역 중심지로 변모합니다. 카르타고는 하드루메툼, 우티카, 케르코우아네 등 옛 페니키아 식민지의 영토와 리비아의 해안지대를 정복, 현재 모로코부터 이집트의 해안지대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지중해 내의 사르데냐, 몰타, 발레아레스 제도, 시칠리아 서편에까지 지배권을 확립했습니다. 서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계속하였습니다.

기원전 5세기 초반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일대의 교역 중심지였다.

기원전 5세기 초반 카르타고는 서지중해 일대의 교역 중심지였다.

도망 노예 찾는 글에 사용된 광고

“도망간 노예를 찾습니다” 테베(Tebes)에서 발굴된 문서 가운데 발견되었습니다. “남자 노예 샘. 그의 주인인 직조 기술자 하프의 집에서 도망. 테베의 선량한 시민들이여. 그를 찾아 주십시오. 그는 하라이인으로 키는 5피트 2인치, 붉은 얼굴색과 갈색 눈, 그가 있는 것을 알려 주는 분에게 금화 반 개를 드립니다. 시민 여러분의 주문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최상의 천을 직물을 짜는 기술자 하프에게 그를 찾아 데리고 온 분께는 금화 한 냥을 드립니다.” 이 내용에서 “시민 여러분의 주문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최상의 천을 직물을 짜는 기술자 하프에게 그를 찾아 데리고 온 분께는 금화 한 냥을 드립니다.”라는 구절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광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春山行夫, 西洋廣告文化史)

티베 또는 테바이(Θῆβαι)는 보이오티아의 도시국가(폴리스)로, 보이오티아와 아티케 지방을 가르는 키타이론 산맥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보이오티아 평원의 남쪽 끄트머리를 이룬 곳입니다. 이 도시는 그리스 신화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카드모스, 오이디푸스, 디오뉘소스 등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테바이는 보이오티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보이오티아 연맹의 맹주였습니다. 아테나이의 주요 적수였으며,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당시 페르시아 편에 섰습니다. 기원전 371년 에파미논다스가 지휘한 테바이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당시 스파르타의 패권을 몰락시켰습니다. 테바이 신성대(정예 군사 부대)는 기원전 338년에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패배하였습니다.

그리스 지역의 테베 고대 유적지

그리스 지역의 테베 고대 유적지

에페소스에서 발견된 매춘 광고

세계 최초의 광고는 에페소스(Ephesus)의 대리석에서 발견된 매춘광고입니다. 흥미로우면서도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 돌은 기원전 100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에페소스 유적지의 거리 중간쯤의 바닥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돌은 기원전 1,00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에페소스 유적지의 거리 중간쯤의 바닥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돌에는 발 모양, 하트 모양, 동그라미, 여성 등 4개의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 발이 여기 있는 것보다 커야 한다는 것은 미성년자 출입을 금하기 위한 것이고 발이 새겨진 방향에 매춘업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에페소스는 터키 이즈미르의 남서쪽 약 50km 지점으로, 양항(良港)을 끼고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에페소스(Ephesus)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 현재의 터키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BC 620년경 이곳에 세워진 아르테미스 신전은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역에서 많은 순례자를 끌어모았으며, 이곳은 BC 7세기∼BC 6세기가 최성기로서, BC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에페소스(Ephesus)에서 발견된 대리석의 매춘광고

에페소스(Ephesus)에서 발견된 대리석의 매춘광고

사진 출처
  • http://www.amphi-theatrum.de/1423.html
  • http://en.wikipedia.org/wiki/Cleopatra
  • http://en.wikipedia.org/wiki/Sumer
  • http://en.wikipedia.org/wiki/Obelisk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Phoenician_alphabet.svg
  • http://en.wikipedia.org/wiki/Carthage
  • http://en.wikipedia.org/wiki/Thebes,_Greece
  • https://farm5.staticflickr.com/4152/5052165802_f322cb5563_o.jpg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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