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의 시장과 상인들의 활동

알라리크는 394년에 로마의 보조군이었던 일족의 지휘를 맡았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와 동맹 관계였으나 다음해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죽고서 아버지에게서 동로마의 지배권을 물려받은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서고트족에게 급료 지불을 정지하자 서고트족은 알라리크를 왕으로 추대하고 서방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알라리크는 394년에 로마의 보조군이었던 일족의 지휘를 맡았다. 다음해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죽고서 아버지에게서 동로마의 지배권을 물려받은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서고트족에게 급료 지불을 정지하자 서고트족은 알라리크를 왕으로 추대하고 서방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서양과 동양의 중세 시대

중세는 유럽에서 4세기경 유럽 북부와 동부로부터 게르만족, 훈족, 고트족 등의 이동이 본격화되면서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였습니다. 410년 여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Alareiks)가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서방세계의 정치구조와 사회 분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은 유럽 대부분과 아시아,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대해 사회적 응집력의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5세기에 유럽 남부와 서부로 이주한 게르만 부족들은 결국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지만 자기들의 관습과 생활양식을 대부분 유지했습니다. 그들이 들여온 사회조직형태의 변화로 중앙집권적 정부와 문화적 통일은 불가능해졌다. 로마 제국시대에 이룩한 비교적 효율적인 농경술이라든가 광범위한 도로망, 급수체계, 선박 운항로 같은 질적으로 향상된 대부분의 생활방식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예술적·학문적 성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부터 르네상스(14-16세기)와 더불어 근세(1500-1800)가 시작되기 전의 시기를 대체로 중세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퇴보현상은 로마의 몰락부터 1000년에 이르기까지 암흑시대라고도 하는 초기 중세에 지속되었으며 다만 샤를마뉴 대제가 확립한 카롤링거 왕조의 개화기에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막간의 그 시기를 제하고는 한시도 거대한 왕국이나 어떤 다른 정치구조가 유럽에 자리잡고 안정을 이룩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회적 통일성의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이었습니다.

중국은 이 시기에 수(隋)나라(581년 – 618년)와 당(唐) (618년 – 907년)로 이어진다. 그후 주(周)나라(690년 – 705년), 오대십국 시대(907년 – 960년), 송(宋)나라 (960년 – 1279년)의 역사적 시기를 거칩니다. 신라가 9세기 후반에 국력이 쇠퇴하자,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고,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종식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926년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한 이후 많은 발해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고대보다 법률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과거제가 소개되었으며, 불교가 번성하였습니다. 993년~1019년 동안 고려는 거란과 전쟁을 벌여서 거란을 격퇴하였습니다. 1238년 몽골이 침입하였고 30년에 가까운 전쟁 끝에 양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 후 공민왕의 자주 개혁이 있기 전까지 원의 간섭을 받았는데, 이 시기 성리학이 한국에 전래되었습니다.

수양제는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켜. 만리장성을 쌓게 하였으며, 또는 아버지가 중단시킨 대운하 공사를 재개시켰다. 이 대운하는 북경에서 항주까지 짓는 대공사였다. 백성들의 불만이 컸다. 하지만 대운하는 남쪽의 장강과 북쪽의 황하를 연결시켜서, 남북 융합에 크게 이바지했다.

수양제는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켜 만리장성을 쌓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중단시킨 대운하 공사를 재개시켰다. 이 대운하는 북경에서 항주까지 짓는 대공사였다. 백성들의 불만이 컸지만 대운하는 남쪽의 장강과 북쪽의 황하를 연결시켜서, 남북 융합에 크게 이바지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와 봉건 통치자들

서양의 중세시대는 봉건 영주를 중심으로 고립된 채 운영되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소수의 행상인이 있어서 정보를 전달하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귀족이나 기사들조차 글을 많이 알지 못한 상태이어서 고대시대의 고시인이 중세에도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거대한 왕국이나 어떤 다른 정치구조가 유럽에 자리잡고 안정을 이룩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회적 통일성의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성직자단과 세속통치권자들이라는 두 집단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서 인간의 정신적 요구와 세속적 요구를 충족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둘이 서로 끊임없이 분쟁과 불일치에 직면하거나 공공연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황제는 성직임명권과 교리문제에 관여할 권리를 요구하면서 교회활동을 규제하려 했습니다. 교회는 도시와 군대를 소유할 뿐 아니라 국정문제에까지 간섭하려고 했습니다. 예컨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죄악이 저질러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적대하는 군주들간의 세속적인 분쟁을 중재할 권리가 교황에게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른 교황들은 파문을 지배도구로 사용했으며 황제의 지위를 박탈할 권리까지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서양의 중세시대는 봉건 영주를 중심으로 고립된 채 운영되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소수의 행상인이 있어서 정보를 전달하는 수준이었다.

서양의 중세시대는 봉건 영주를 중심으로 고립된 채 운영되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소수의 행상인이 있어서 정보를 전달하는 수준이었다.

서양과 중세의 부흥

12세기에 문화적·경제적 부흥이 일어났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의 기원을 이 시대에서 찾고 있습니다. 경제력의 중심은 서서히 지중해 동부지역으로부터 서유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술과 건축에서는 고딕 양식이 발전했습니다. 도시가 번창하고 여행과 교통은 더 신속하고 안전하고 손쉽게 되었으며 상인계급이 발전했다. 농업의 발전도 한 가지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2세기에는 콩의 경작이 이루어져 사상 최초로 모든 사회계층이 균형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이것은 결국 낡은 봉건적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13세기는 중세문명의 절정기였습니다. 고딕식 건축과 조각의 고전적 정형이 확립되었고 서로 다른 많은 종류의 사회적 단위 등이 생겨났습니다. 길드라든가 조합, 시회의, 수도회 등이 결성되어 각기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적 대표 개념이 발달하여 자신들을 선출해준 공동체와 결부된 문제에 관해 전적인 결정권을 갖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회의체가 생겨났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도하는 지적 생활 분야는 스콜라 철학으로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그 뛰어난 대변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교부들에 관한 저작을 통해 서양 지성사에서 가장 위대한 종합의 하나를 이룩해냈습니다. 중세에 이루어진 봉건적 사회구조의 붕괴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발전 및 스페인·프랑스·잉글랜드 등지의 국민국가의 등장과 아울러 세속교육의 발달과 같은 문화적 발전들은 새로운 정신을 지닌 자의식적인 새 시대의 탄생을 가져왔는데, 이는 고전적 학문을 자기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12세기에 문화적·경제적 부흥이 일어났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의 기원을 이 시대에서 찾습니다. 경제력의 중심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서유럽으로 옮겨간다. 예술과 건축에서는 고딕 양식이 발전했습니다. 도시가 번창하고 여행과 교통은 더 신속하고 안전하고 손쉽게 되었으며 상인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농업의 발전도 이 발전의 한 가지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12세기에는 콩의 경작이 이루어져 사상 최초로 모든 사회계층이 균형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인구가 늘어나고 이는 결국 봉건적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요인이 됩니다.

4-13s

13세기는 중세문명의 절정기였다. 고딕식 건축과 조각의 고전적 정형이 확립되었고 서로 다른 많은 종류의 사회적 단위 등이 생겨났다. 길드라든가 조합, 시회의, 수도회 등이 결성되어 각기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중세시대의 상인은 제한된 범위내에서도 교역은 이루어졌으며 길드들보다 부유했던 상인들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중세시대 호객인의 활동

개인의 부가 축적되고 상거래에도 경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기록에 따르면 중세의 고시인 또는 호객인은 고지 또는 광고를 외치기 전에 피리를 불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고 합니다. 1235년 수도승의 수기에는 술집에 소속된 고시인을 고용하여 “신은 위대하다. 신은 자비롭다.”고 외치고 다니게 한 내용이 나옵니다. 호객인이란 물건을 사도록 호객을 하는 사람인데, 자신의 물건을 팔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물건을 팔아주려고 호객 행위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상점 주인들은 고객을 끌어들이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호객인을 두었습니다.

마르셀 카리오의 『시대를 통해 본 광고』 : 중세시대 광고가 호객인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있던 고시인이 다시 등장한 것은 12~13세기로… 중세로부터 16세기말까지의 광고 선전의 수단은 고대와 거의 다를 게 없어, 이들 고시인과 상점의 초보적인 간판, 그리고 호객인들뿐이었다.”

광고용 인쇄 전단의 등장 : 1740년 런던의 한 의복 상인은 고시인이 휴대하고 다니던 게시판에 광고용 인쇄 전단을 붙일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상업용 전단이 대량으로 살포되면서 고시인의 위력은 쇠퇴하였습니다.

파리의 호객인 : 중요하고 값비싼 상품은 동업 조합인 길드에 가입한 상점에서 팔았으나 일상생황용품이나 식료품 등은 거리의 노점에서 주로 팔았고 이러한 환경에서 호객인들이 활동했습니다. 1545년에 나온 『매일 파리에서 크게 들리는 107가지 목소리』

체리 우먼(cherry woman) : 영국에서는 과일 행상들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까지 떠돌아 다니면서 특산품 과일을 팔았는데 주로 여자들이 했습니다. 여성다운 기지로 마치 노래 부르는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호객을 하고 다녔습니다.

런던 호객인의 복장 : 『런던 호객인 』의 방물장수 “뭐든 필요한 것은 다 있습니다.” 두통의 술을 당나귀에 싣고, 단정하게 쓴 모자 왼쪽에 꽃까지 꽂고, 왼쪽 손에는 채찍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앞치마의 끈을 만지작거리며 당나귀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는 상품이 모두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시골을 순회하는 상점 격인 행상인이 나타났습니다. 거리에서는 같은 업종의 상인들이나 수공업자들이 일정한 정소에 모여 전문가를 형성하기도 하며 일반적인 시장과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교회가 시장에 직접 간여하는 양상으로 바뀌어갔다. 교회의 구내에서 열렸던 시장은 교회나 사제가 관리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습다.

4-18s

중세 초기 유럽에서는 상품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시골을 순회하는 상점 격인 행상인이 나타났다. 거리에서는 같은 업종의 상인들이나 수공업자들이 일정한 정소에 모여 전문가를 형성하기도 하며 일반적인 시장과 공존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laric_I
  • https://en.wikipedia.org/wiki/Sui_dynasty
  • http://en.wikipedia.org/wiki/Nuremberg
  • http://en.wikipedia.org/wiki/Hanseatic_League
  • https://fishmarketblog.files.wordpress.com/2009/12/bruegelcarnival.jpg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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