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황혼과 16~17세기 유럽 국가들

중세의 황혼과 과학혁명의 시대

중세(Middle Ages)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의 몰락하던 395경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시기인 13~15세기까지를 가리킵니다. 중세 후반에 들어서 유럽 인구는 되풀이해 발생한 전염병과 잦은 기근, 끊임없는 전쟁과 사회적 긴장으로 크게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340년경의 유럽 인구는 약 7,500만 명이었는데 지중해에서 스칸디나비아까지 유행병이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4년도 채 되지 않아 유럽 인구의 1/3이 죽음을 맞는 일이 벌어집니다. 인구가 감소하자 노동력이 부족해졌고 결국 영주들은 농노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주거나, 농노와 거래를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중세 유럽의 기본을 이루던 장원 제도와 봉건 제도가 몰락했습니다.

인구가 감소하면서 남아 있는 노동자들은 희소가치가 높아져 임금은 올라가고 농촌의 소작료는 내려갑니다. 영주와 지주 중심의 유럽의 중세 봉건질서의 변화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줄어들수록 땅과 자본은 상대적으로 더 풍부하고 값이 싸졌습니다. 노동력이 비싸지고 땅과 자본이 싸지자 땅과 자본이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새로운 도구 개발을 위해 과학 기술을 사용하여 노동자들의 노동이 더 생산적일 수 있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중세의 황혼기에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치에 대한 자본 투자가 활발해지고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여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믿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신이 이성의 자연적인 빛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적 계획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념에 차 있던 행성운동의 법칙을 밝힌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근대 과학을 본격화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 이들에 의해 새로운 과학혁명 시대를 맞습니다. 더불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프란시스 베이컨 같은 철학자들이 등장하여 유럽 근대 철학의 기초를 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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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여 학계와 대중 양측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는 사회 계약설을 제시하여 후대에 영향을 끼칩니다. 모든 인간은 천부의 권리를 가지는데, 자연 상태에서는 이러한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계약을 맺어 국가를 구성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국가에 위임하였다는 견해를 사회 계약설이라고 합니다. 사회 계약설에 따르면 국가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합법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 행사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중대하고 명백하게 침해할 경우에 시민은 여러 가지 구제 수단을 강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봉건 영주와 지주 그리고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의 지배방식에서 국가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이론인 셈입니다.

유럽 사회의 변화

14세기 후반부터 유럽을 뒤흔든 르네상스이 저물고 서유럽은 봉건 체제의 틀을 벗고 있었습니다. 사회 변화도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인구가 줄어들자 기본 식료품 가격이 내려갔다. 식료품이 싸지자 농촌과 도시인들은 더 많은 소득을 위해 식품의 질을 개선하고 다양화했습니다. 그들은 도회지에서 만드는 공산품을 더 많이 사들여 도시 경제에 도움을 주었다.  중세의 마지막 가격 변동은 농민보다 도시 장인들에게 더 유리했고 지주보다는 도시 상인들에게 더 유리했습니다. 

도시 상인과 금융업자의 강화

16~17세기의 변화는 지주 귀족의 지도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반면 도시 상인과 금융업자들의 세력과 영향력이 강화됩니다. 유럽 대륙 내부의 상품 거래가 늘어나면서 몇몇 상품은 봉건시대의 지역을 넘어서 거래되는 대규모 통합적 시장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서로 차이를 보이던 밀값은 평준화되었고, 모든 지역의 물가가 같은 방향으로 변동하는 경향도 나타납니다. 하나의 통합된 곡물시장이 출현한 것이다. 발트 해 연안지방은 전문적으로 밀을 생산해 멀리 떨어져 있는 서유럽에까지 수확물을 팔게 되었습니다.

가격혁명과 절대왕권의 대항해 시대

화폐 가치의 잦은 하락에 뿌리를 두는 ‘가격혁명’이라고 부르는 물가 폭등이 일어났습니다. 중요한 요인은 새로운 귀금속, 특히 은이 통화 공급에 혼합되어 통화가 팽창했기 때문입니다. 1550년부터 “아메리카의 보물”이라고 불리던 은이 스페인에 대량으로 들어왔고, 다시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유입되었습니다. 1494년에 이미 스페인은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침략하기 시작했던 결과입니다. 그와 동시에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할 인구가 늘어나자 화폐가 빠른 속도로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물가 수준은 통화량과 그 유통 속도에 직접 영향을 받습니다. 새로운 자원인 은과 새로 늘어난 인구는 광범위한 물가 폭등을 일으켰습니다. 16세기의 인구증가와 도시집중은 풍부한 식량공급을 요구했으며 16세기 전반에 걸쳐 밀값은 꾸준히 올라갔습니다. 식량, 특히 밀값을 치르기 위해 화폐는 다시 도시에서 농촌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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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탐험을 시작한 이유는 각종 향신료의 수입을 위한 인도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금과 보물이었다.

마젤란이 서쪽으로 돌아 지구를 일주하는 항해에 나선 1519년에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자 남북의 아메리카는 식민지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식민지 건설은 귀금속과 목축 및 농장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귀금속은 인디언를 지배하면서 이용해 손에 넣었고, 목축 및 농장은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노예들을 이용했습니다. 이 때부터 아프리카에 대한 노예사냥이 본격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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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베네치아를 묘사한 그림

가격 혁명이 일어나고 아메리카산 금, 은이 유입되고 상인 계급의 성장이 두드러졌고 이들이 절대왕정의 자금줄 역할을 해 17세기는 절대 왕정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해외 팽창은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민족주의를 반영합니다. 이런 정치적 변화는 세습군주국의 중앙집권화한 힘이 국내를 통일하고 지방의 특권을 폐지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17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이 일어나는 등 절대 왕정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한편 동아시아 문명과 서양 문명의 접촉이 본격화되어 교역이 이뤄졌습니다.

대항해시대라 불리는 신항로 개척은 이 시대에도 활발히 이루어져 유럽의 해양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칼레 해전에서 꺾은 영국이 급격히 성장했고 신생 독립 국가인 네덜란드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16세기의 최강자였던 스페인은 영국에 패배한 이후 왕권 다툼으로 쇠퇴해 갑니다. 하지만 광대한 식민지를 바탕으로 포르투갈을 압박하는 등 아직은 유럽의 강국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영국과 해상의 주도권 다툼을 치열하게 벌였습니다. 특히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장악하고 일본과 교역을 독점합니다.

봉건적 토지 관계의 변화와 도시 상인과 은행

영주는 직접 땅을 경작할 수도 있었고 고용 노동자들을 통해 땅을 경작했습니다. 16세기에는 봉건제도가 자본주의적 임대차 제도로 바뀌었습니다. 소작인 노동력은 급속히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주는 봉건적 토지 보유를 임대차에 따른 토지 보유로 바꾸는 것이 이익이었고 여기에는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이전의 장원에서 장기 임대차 계약을 맺고 땅을 보유하는 농민들이 등본 보유권자, 즉 봉건적 의무만을 짊어지는 잠정적 부동산권 보유자를 차츰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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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분쟁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163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 스웨덴 등 여러 강대국의 이권 분쟁으로 변한다. 역사학자들은 이 전쟁을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정의한다.

대개 도시에 거주하는 유력한 상인인 기업가는 원료를 사들여 수공업자나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반제품(半製品)을 다른 기능공에게 넘겨 완제품을 매매했습니다. 16세기에는 국제적 금융시장이 출현했는데 독일 남부의 은행들이 만들었습니다. 이 은행들은 로마 같은 유럽 남부 도시와 안트웨르펜 같은 북유럽의 금융 중심지 사이에서 자금 중개역할을 했습니다. 이 은행들은 유럽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던 여러 증권거래소에서 발행한 환어음을 통해 엄청난 자본을 유통시킬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30년 전쟁

프랑스 국왕의 재정 수요는 상업과 산업을 촉진해야 할 끊임없는 필요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17세기 중반 태양왕 루이 14세가 즉위하여 18세기 초반까지 프랑스를 이끈다. 그의 치세에 귀족 문화를 비롯해 바로크 문화가 꽃피었으나 30년 전쟁 등에 과도한 재정을 쏟아 붓는 바람에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또 당시 유럽의 흐름인 신항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해 영국과의 국력차 역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30년 전쟁은 1618년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를 탄압한 것에 대해 개신교를 믿는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전쟁으로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납니다. 이 전쟁은 종교적 성격이 강했고 후반부에는 유럽 국가간의 이권 싸움의 성격이 강합니다.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국과 보헤미아 사이의 종교싸움이었으나 곧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가 개신교도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163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 스웨덴 등 여러 강대국의 이권 분쟁으로 변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 전쟁을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전쟁으로 독일 지역은 지역 대부분이 황폐화되고 인구가 크게 떨어졌으며, 베스트팔렌 조약의 영향으로 여러 개의 영방국가로 나뉘게 됩니다.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각각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고, 프랑스와 스웨덴은 영토를 늘렸다. 종교적 측면에서는 루터교회 뿐만 아니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독일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가 쇠퇴한 가운데 베네치아 공화국이 부를 누리고 있었으나, 지중해 무역의 쇠퇴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폴란드와 러시아

폴란드는 대홍수를 겪으며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러시아는 시베리아 지역을 장악해 나갔다. 한편 17세기 후반에는 표트르 1세가 출현하여 서유럽식 재정비를 시도하고 청과도 교전을 벌였습니다. 동쪽에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강력한 독재군주국으로 새로이 등장합니다. 이반 대제라고 불리는 이반 3세는 콘스탄티노플과 키예프의 전통을 자신이 계승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노브고로트를 점령하고 타타르족의 종주권을 거부했는데, 모스크바 대공국이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이 세력 팽창은 그의 아들 바실리 3세의 스몰렌스크 점령과 손자 이반 4세(1533~84 재위)의 원정으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Isaac_Newton
  • http://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Columbus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5/Canaletto_(II)_002.jpg
  • https://en.wikipedia.org/wiki/Thirty_Years%27_War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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