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와 18세기 유럽과 영국의 광고

세계 최초의 인쇄 광고물, 팸플릿(pamphlet)

독일에서는 인쇄술의 보급과 함께 종교 개혁가들이 포교의 수단으로 인쇄물을 사용합니다. 프랑스에서는 독일과 달리 운문이나 산문으로 쓴 황당무계한 읽을 거리가 주로 인쇄되어 일반인에게 보급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런 인쇄물을 ‘호객 상인의 책’(chapbook)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책이라고 부르기보다는 팸클릿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팸플릿은 원래 대중의 교화를 위한 종교적인 선전물로 시작되었으나 차츰 일반 대중의 읽을거리로 발전하였습니다. “보다 빠르게, 보다 많이, 보다 넓은 범위의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한 인쇄물”로서 오늘날에는 정치적인 것과 함께 상업적인 PR을 위한 것으로 대중화되었습니다. 신문이나 잡지도 처음에는 팸플릿 형태를 띠었다가 오늘날처럼 변형되어 발전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설교를 반박한 로제스터의 한 주교 『설교집』(1521)이 팸플릿으로 부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인쇄물입니다. 대기업을 위한 팸플릿으로서는 『상업론』(A Treatise of Commerce)가 세계 최초의 팸플릿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업론』은 특정 대상에게 직접 읽히도록 만든 인쇄물로 오늘날의 다이렉트 광고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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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독일과 달리 운문이나 산문으로 쓴 황당무계한 읽을 거리가 주로 인쇄되어 일반인에게 보급되었는데 ‘호객 상인의 책’(chapbook)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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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론』은 특정 대상에게 직접 읽히도록 만든 인쇄물로 오늘날의 다이렉트 광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인쇄 뉴스(news)의 출현과 신문 광고의 시작

구텐베르크 인쇄기 덕분에 콜럼버스의 항해 소식은 유럽의 각지에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벗어나 지리적, 철학적, 경제적 경계를 넘어서고 인쇄기가 확산됨에 따라 뉴스 미디어 발전의 기반이 마련된 것입니다. north, east, west, south의 첫 글자가 모여 뉴스(news)라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사방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뉴스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로마시대에 손으로 써서 붙이거나 배달되던 일보(日報)가 있었는데 , 3세기경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12세기에 필사 뉴스 형태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필사 뉴스 외에도 지배층이나 사제, 학자,들 사이에 교환되던 편지에 의한 뉴스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필사 뉴스는 개인적인 편지의 수준으로서 대중적인 뉴스 전달 미디어라고 할 수 없다. 대중적인 뉴스 미디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보급된 후에나 가능해졌습니다.

인쇄술이 보급된 직후인 1462년 퀼른의 ‘디히트리히 대주교의 선언’과 1849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를 공략한 뉴스를 인쇄한 것이 뉴스를 처음 인쇄한 것입니다. 1470년경 이탈리에서 열린 토너먼트 경기에 대한 뉴스도 뉴스도 최초의 뉴스들 중 하나입니다.

최초의 상업 광고는 1626년 11월 21일자 네덜란드 한 신문에 4절 정도의 크기로 실린 잡화 광고입니다. 17세기 전반기에는 국왕이 조합에 독점권을 허가해주면 납부금이나 기부금을 걷어 궁정이나 국가의 재정에 충당하던 시기라서 광고의 필요성이 없어져 광고의 발달이 정체됩니다. 따라서 사람을 찾는 일이나 부동산 매매, 금전 대차 관계의 전단이 고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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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있는 최초의 신문인 『가제트 드 프랑스』를 창간한 르노도

프랑스의 테오프라스트 르노도(Theophraste Renadot)

르노도는 국왕으로부터 지방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라는 임명을 받아 병원과 광고국의 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파리에 건물을 짓고 병원과 광고국을 동시에 개업하였습니다. 광고국의 명칭에 ‘수요자와 공급자의 의논’이란 뜻을 지닌 ‘Rencontre’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근대 광고에서 중대의 역할을 이해한 최초의 인물로서 프랑스에서는 신문의 아버지라고도 부릅니다.

1631년 5월에 주간신문 『가제트 드 프랑스(Gazette de France)』를 발행합니다. 유럽에서 최초의 주간신문이 등장한 지 22년 후였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습니다. 르노도의 1634년 신문에 실린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갈릴레이 재판과 그의 유죄 선고 사건입니다. 『가제트 드 프랑스』는 갈릴레이가 기소되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보도하면서 그의 죄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다’라고 주장한 데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광고국에서는 여행사와 같이 여행을 안내하거나 여행 일정을 짜주고 교통편을 조사해서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밖에도 부동산 거래. 신용 조사, 미술품 갤러리, 골동품 거래, 약방, 운송업 등 여러 거래를 알선, 중개하였고 의류나 기구 교환장소로도 이용되고 상품 거래 명세서나 품질 보증 각서를 대신 써 주거나 광고 전단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신문사 광고국 또는 광고 대행사의 원형적인 모습을 이 사레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존 휴튼(John Hougton)와 커피 하우스

존 휴튼은 영국 초기 광고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사람으로 그가 간행한 『농업과 상업의 개선을 위한 컬렉션』 에서 왕립 협회 회원들의 우수한 경험과 지식을 널리 날리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3인칭화하여 광고를 객관화 시켰으며 신용할 수 없는 광고는 일체 취급하지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았으며 양심적인 상인과 조제공을 만나면 자진해서 광고를 실어주었습니다. 휴튼 자신도 진실성 여부에 대해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일부러 작은 활자를 사용하여 다른 광고와 차별화했습니다.

이 시기 커피 하우스(coffee house)가 생겼습니다. 오늘날의 커피숍과 어떤 점이 다르고 같을까요. 17세기와 18세기에 영국인들이 주로 마시던 음료는 커피였습니다. 1650년경 옥스포드의 제이컵이 영국 최초로 커피 하우스를 열었습니다. 그후 런던에는 18세기까지 수천개에 이르는 커피하우스가 열리고 이곳이 뉴스를 나누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세계적인 해운업이 있었지만 선주(船主)와 하주(荷主)를 중개하는 기관은 없었으며 선술집과 연관에서 상담을 하였는데 예루살렘 커피하우스라는 찻집이 생겨 이 집이 거래소를 대신하는 정소가 되었습니다.

당시 런던에는 수많은 잡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증권이나 테니스 같이 특정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커피하우스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신문을 무료로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을 위하여 광고의 원고를 신문에 갖다 주는 서비스도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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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는 18세기까지 수천개에 이르는 커피하우스가 열리고 이곳이 뉴스를 나누는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신문을 무료로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을 위하여 광고의 원고를 신문에 갖다 주는 서비스도 제공했다.

18세기 영국의 신문과 광고

찰스 포비(Charles Povey)는 1705년 간행한 『상업 기사』에서 새로운 광고 요금의 기준을 제시한 매우 진취적인 저널리스트로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 인물입니다. 그는 상입 거래소라는 기관을 만들고 기관지로 『상업 기사』라는 광고 전문 신문을 간행하여 상품 매매와 고용인 모집 광고를 내는데 이 신문은 ‘문장이 그리 길지 않은’ 광고는 1회에 2실링의 균일 요금을 받았으며 카피라이팅의 기초를 제공할 만한 최초의 발언을 남겼습니다. 찰스 포비는 광고만 실린 정기 간행물로 무료로 상점이나 사무실 등에 배포되었으며 돌아가며 읽은 다음 소포용의 포장지로 두루 사용해 달라는 부탁이 덧붙여졌다.

짧은 글로도 긴 글 못지 않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긴 글은 독자들이 다 읽지 않아 오히려 불편합니다. 짧은 글은 사람들이 거의 다 읽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기억해 줍니다.
영국과 미국의 일간 신문지 시대

영국에서는 1695년 신문의 독점 발행권이 폐지되면서 출판의 자유가 신장되어 신문 붐이 일어나고 일간 신문의 새로운 전성기를 맞습니다. 18세기 초기의 광고에는 대중 오락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목검 시합과 곤봉 시합이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포스트 맨』에 실린 목검 시합 광고, 『스펙테이터』에 실린 셰익스피어 광고, 장애인 이사 광고, 사람 찾는 광고 등18세기 초 신문 광고에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광고주끼리의 싸움이었습니다. 모조품 광고에 대한 중지 요구, 현미경 광고에 대한 과대 광고(1707), 등. 따라서 영국에서는 1712년 6월 신문 광고에 대한 과게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고 1행에 일률적으로 1실링의 세금이 매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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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신문 원본

18세기의 영국과 미국에서는 신문의 합병이 빈번했습니다. 영국 최초의 일간지이던 『데일리 커런트』(1702)도 『데일리 가제티어』 로 제호를 바꾸었으며 그후 4회에 걸쳐 이름을 바꾸다가 1795년 『모닝 포스트』로 합병되었습니다.

광고 모집인 출현도 광고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데일리 가제티어』는 1746년부터 ‘런던 애드버타이저라는 부제호를 붙이면서 광고를 싣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애드버타이저라는 명칭이 뉴스 겸 광고지의 대명사처럼 쓰여 유력한 신문일수록 이 용어를 제호나 부제호로 다투어 사용하였습니다. 18세기 신문인과 광고인들은 사회의 유명인사로 행세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당시는 유럽 전체적으로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고 계몽주의 사상이 세계를 휩쓸던 때였으며 미국의 독립 혁명이 싹트고 자유 노동자와 상공인이 새로운 사회 계급으로 등장, 근대 시민 사회의 기틀이 다져지고 있었습니다.

18세기말 영국 신문에 실린 ‘포드 버지니아’ 담배 광고입니다. 18세기는 식민지 개척과 대항해시대가 절대왕권과 도시 상인들에 의해 추진되고,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영국이 북미를 식민지로 삼아 급격하게 성장하던 시절이다. 신문은 이 시절에 거의 유일한 정보 전달 도구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삽화를 곁들인 광고가 등장합니다. 광고 삽화에는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과 농장주로 보이는 백인이 칼 같은 것을 들고 앉아 있습니다. ‘포드 버지니아’ 담배가 북미에서 만들어져 영국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배 그림도 그려넣은 것 같습니다. 작은 광고 하나에 18세기말 흑인 노예들의 고된 현실과 식민지적 국제 관계가 고스란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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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말 영국 신문에 실린 ‘포드 버지니아’ 담배 광고.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과 농장주로 보이는 백인이 칼 같은 것을 들고 앉아 있다. ‘포드 버지니아’ 담배가 북미에서 만들어져 영국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배 그림도 그려넣은 것 같다.

18세기 신문 광고. 인쇄와 삽화 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신문 광고. 인쇄와 삽화 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이 있는 명함

18세기에는 상인들이 목판이나 동판을 사용해서 정교하게 인쇄한 카드를 지니고 다니면서 자신과 자신의 직업을 표시하였습니다. 카드는 거래 상대자나 고객이 자신을 잊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표시로 오늘날의 명함의 전신입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카드는 1676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파리에 살았던 상인의 것으로 트럼프의 뒷면에 주소와 상품의 목록을 인쇄한 것입니다.

18세기 꿀뚝을 청소하는 사람의 명함 카드

18세기 꿀뚝을 청소하는 사람의 명함 카드

사진 출처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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