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이 만든 매스미디어 출현과 광고의 변화

기계와 동력 발전 그리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가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제 단위가 되었으며 저렴한 상품이 대량으로 공급되고 가내 수공업이 침식되었습니다. 반면 도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가정의 독립적인 생산은 불가능해지고, 대량 생산된 제품의 소비가 증가하면서 제조업자들은 제품을 알려야 하는 중요성은 인식합니다. 또한 교통의 발달로 먼 거리의 장소에까지 제품에 대해 마케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합니다. 산업혁명의 혁신은 소비 방식에도 양향을 끼쳐 백화점과 체인점 같은 새로운 형태의 소매점이 등장하고 소비와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시화시켰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소비 열망을 확산시킵니다.

백화점(百貨店)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제공하는 시각적 소구에 주력하여 쇼핑을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의무가 아닌 즐거운 활동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백화점처럼 다양한 상품을 한 장소에 모아 놓고 판매하는 소매상점 형태태는 산업혁명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백화점은 교회 갈 때 옷을 잘 차려 입고 가며 상류층들이 모이는 공공장소가 되며 점원들도 상류층 여성을 고용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또한 정찰제를 실시하고 상품의 회전율을 높여서 판매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1867년 문을 연 프랑스의 르봉 마르세 백화점

1867년 문을 연 프랑스의 르봉 마르세 백화점

인쇄술과 문맹률 그리고 매스미디어

산업혁명이 이룬 변화에 알맞은 광고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여 대량의 정보 및 시사내용, 당대의 이슈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매스 미디어(mass media)가 존재해야 했습니다. 최초의 매스미디어는 신문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또한 광고는 신문의 재정적 기반을 제공하여 매스미디어가 존속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은 1,000년 이상 라틴어를 출판물의 공통 언어로 사용해온 유럽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책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 평민들이 정부 관료로 등용되기도 하고 대중들도 글을 깨쳐, 성직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특권이 상실되어 르네상스, 민족주의, 중상주의가 성장한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보급된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 유럽에 1,000만권의 책이 인쇄됩니다.

페니 프레스로 불리는 신문은 1833년 벤자민 데이의 『뉴욕 선』(New York Sun)을 기점으로 신문이 대중화되며 이는 종이 생산과 인쇄 그리고 전보 기술의 발명 등에 힘입어 탄생되었으며 싼 가격 덕분에 보통의 사람들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1830년대부터 의무교육이 보편화되고 19세기 공업화가 이룬 경제적 발전을 통해 의식주가 향상되고 교육을 받은 대중들이 스스로를 경제와 정치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페니 프레스는 정보 발표문, 대통령 연설문, 국회의원 편지 등을 뉴스로 수집하여 신문을 만들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사람을 고용하여 뉴스를 취재하고 경찰, 스포츠, 종교, 금융 등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들을 다룬다. 뉴스의 초점이 부유한 엘리트층의 관심사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중산층의 일상생활로 옮겨집니다.  신문의 보급 방식도 선불 구독료를 사용하거나 완전히 바뀐다, 가두 판매를 벌이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며 매스 미디어로서 신문이 경제적 기반을 구독료가 아닌 광고료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벤자민 데이의 『뉴욕 선』은 다른 신문들과 같이 광고료를 받으면서도 각 광고 지면을 대폭 축소하는 방법을 통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합니다. 매스 미디어 신문의 종류가 증가하다 광고주들은 신문 선택, 광고료 협상, 인쇄업자 감독, 광고 게재 여부 확인, 비용 입금 등의 여러 과정을 대행할 광고 대행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됩니다.

1839년의 『뉴욕 선』(New York Sun)

1839년의 『뉴욕 선』(New York Sun)

산업혁명기의 신문

19세기초 유럽이나 미국의 교육받은 시민계층은 비밀신문의 형태지만, 객관적 뉴스 보도와 정치논평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작가나 편집인에 의해 정론지의 기본형태가 갖추어졌고, 선정적이기는 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한 대중지가 탄생했습니다. 19세기말 미국과 영국에서는 근대적 형태의 신문사와 제작양식이 확립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신문은 문학의 영역에서 ‘사업’의 영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인쇄술 혁명과 교통·통신 발달로 신문은 주당 수천 부에서 수만 부로 성장했습니다. 수요가 늘자 필요는 곧 신문인쇄술의 발명을 낳았습니다. 1814년 런던의 〈타임스〉는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이중인쇄’(double-press) 방식을 도입하여, 시간당 5,000부를 인쇄하게 되었습니다. 발매능력이 증대되면서 〈타임스〉의 발행부수는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5,000부에서 5만 부로 급증했습니다. 자동 인테르 활자, 저가(低價)의 얇은 두루마리 신문용지를 생산하는 장망초지기(長網抄紙機), 곡면인쇄판, 자동잉크 주입기, 원통형 윤전인쇄기(1865)가 발명되면서 손 작업 목판인쇄방식은 구식이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는 각 행과 열을 일일이 손으로 짜맞추어 정렬한 후 인쇄를 하고, 다음 사용을 위해 활자를 알파벳 순서대로 제자리에 돌려놓았습니다.

인쇄기술 혁명은 오트마 메르겐탈러가 라이노타이프( 자동식자주조기)를 발명하여 자동으로 식자를 하면서부터였다. 〈뉴욕 트리뷴 New York Tribune〉은 1886년에 최초로 이 기계를 도입했고, 영국에서는 1889년 〈뉴캐슬 크로니클 Newcastle Chronicle〉이 최초로 사용했습니다. 1895년에는 당시 런던 언론계의 중심지였던 플리트가(街)의 모든 출판업체에서 이 새로운 기계를 사용했습니다. 라이노타이프의 오퍼레이터는 손 작업 활자공보다 6배나 빨리 판을 짤 수 있었습니다. 1884년에는 인쇄에 전력을 사용하게 되고, 인쇄뿐 아니라 모든 크기의 신문을 절단하고 접고 묶을 수 있는 기계가 개발되어 관련 산업은 크게 발전했습니다. 통신 발달로 전화나 해저 케이블을 사용하여 도시나 국가간의 뉴스를 신속하게 취합할 수 있게 된 것도 신문산업을 크게 발전시킨 요인이었습니다.

근대적 저널리즘의 출현

특파원을 파견시켜 뉴스원으로 삼던 1815년에는 브뤼셀 부근 사건을 런던에 전달하는 데 보통 4일이 걸렸습니다. 철도와 전보 같은 다른 통신수단의 개선은 취재기자의 시간·공간 개념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철도망 발달로 기자들이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서, 신문 배달도 원활하게 되자 신문은 대중적인 일상 필수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수도에 본부를 둔 거대 신문들이 교통 발달에 광범위한 지역에 신속한 배포·배달이 가능해지면서 전국지로 성장하였습니다.

19세기에 신문기자 직업이 훨씬 더 전문적인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의 언론인은 혼자서 기사를 작성·편집·인쇄했으나 신문이 성장함에 따라, 기사 취재를 주업무로 하는 전업기자가 대거 채용되었습니다. 최초의 종군기자 가운데 1명이었던 〈런던 타임스〉의 윌리엄 러셀은 크림 전쟁(1853~56)에 파견되었는데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크림 반도에서 간호를 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바로 그의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고 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65)에는 150명이 넘는 종군기자가 파견되었습니다. 종군기자들은 전쟁터에서 열띤 취재경쟁을 벌여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했으며, 평화시에는 현장기자들이 과감한 특종기사로 영웅이나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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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북전쟁에는 150명이 넘는 종군기자가 파견되었다. 종군기자들은 전쟁터에서 열띤 취재경쟁을 벌여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했으며, 평화시에는 현장기자들이 과감한 특종기사로 영웅이나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통신사의 출현

여러 달 동안의 기자 파견 비용은 작은 신문사로서는 감당하기에 벅찼습니다. 이 해결방법으로 생긴 것이 바로 통신사였습니다. 프랑스의 사업가인 샤를 아바스(Charles Havas)는 1835년 주요 유럽 신문의 기사를 번역하여 프랑스 언론에 공급하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후 이 회사는 런던·파리·브뤼셀 등지를 연결하는 전서구(傳書鳩) 업무를 개시하여, 뉴스를 판매하고 광고를 다루는 국제적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아바스의 고용인이던 로이터는 1851년, 해외의 상업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를 런던에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는 전신 및 해저 전신망을 이용하여 언론사에 외신을 공급하는 통신사로 급성장했고, 대영제국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 회사의 취재 영역 또한 확대되었습니다.

미국 통신사는 유럽과 매우 다른 방법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뉴욕의 6개 신문사가 평소의 경쟁관계를 유보하고, 멕시코 전쟁(1846~48)의 취재경비를 절감할 목적으로 공동취재를 위한 뉴욕연합통신사(New York Associated Press)를 만들었습니다. 통신사들은 세계 곳곳의 ‘현장 뉴스’를 있는 그대로 공급하여 객관적 뉴스 보도의 기준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미국에는 외신을 주로 취급하는 통신사 이외에도 특집기사를 제공하는 통신사가 있어서 의학 칼럼이나 서평에서부터 별자리점, 낱말풀이 퀴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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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샤를 아바스(는 1835년 주요 유럽 신문의 기사를 번역하여 프랑스 언론에 공급하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후 그는 런던·파리·브뤼셀 등지를 연결하는 전서구(傳書鳩) 업무를 개시하여, 뉴스를 판매하고 광고를 다루는 국제적 회사로 성장했다.

광고대행사 활동의 본격화

광고대행사는 독립 기업으로, 광고주나 매체 또는 광고물 제조업체와는 무관한 중립성이 요구됩니다. 광고대행사는 광고를 창작·계획하고, 제작하여서 매체를 이용해 게재 또는 방송하며, 요금지불의 책임도 집니다. 광고대행사는 몇 사람이 하는 소규모 회사에서부터 세계 각국에 지사를 두고 수천 명을 고용하고 있는 대규모 회사인 경우도 있습니다. 조직부문은 ① 광고주와 연락을 유지하는 어카운트 서비스(account service), ② 창작을 하는 크리에이티브(creative), ③ 조사부문, ④ 매체 및 그 밖에 경리·인사 등을 다루는 부문으로 나누어집니다.

선진국의 광고는 대부분이 광고대행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광고대행사 수입은 갖가지 서비스의 대가로 받는 광고료의 15%선의 수수료가 국제적 통례로 되어 있습니다. 광고대행사의 효시는 미국의 볼니 파머(Volney Palmer)로서 1840년대에 보스턴·뉴욕·필라델피아에 사무소를 두고, 주로 신문·잡지의 지면을 도매로 사서 광고주들에게 쪼개 파는(소매), 이른바 스페이스 브로커였으며 에이전시(agency)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합니다.

조지 로웰(George Rowell)은 에이어 앤드 선(Ayer & Sun) 대행사를 설립하여 공개계약제를 도입합니다. 지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던 방식에서 벗어나 신문사와 광고주에게 지면 구매 가격과 판매 가격을 공개하여 대행사가 가져가는 수수료를 15%로 책정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다소 변화하면서 지금의 광고대행사의 활동의 원형이 됩니다.

19세기 중반 광고 메시지의 특징

페니 프레스가 등장한 시기의 광고들은 정보를 위주로 한 문제 광고가 대세였습니다. 당시 리처드 보니(Rechard Bonner)은 메시지를 반복하여 제시하여 광고 효과를 개발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1850년대의 대행사들은 광고주를 위해 카피 서비스를 도입하는데 이 서비스가 이후 광고 대행사의 중요한 기능으로 정착합니다. 또한 신문 광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광고방식으로 포스터나 전단지, 팸플릿, 보조 인쇄물, 간판, 밴드, 퍼레이드 등이 등장합니다. 또한 다중 색상 인쇄 방식인 크로모리토그라피(Chromolitograph)라는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트레이드 카드(trade card)라는 두꺼운 종이에 제품과 인물, 정보, 슬로건, 일화 등을 인쇄한 카드가 유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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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이 발달하면서 트레이드 카드(trade card)라는 두꺼운 종이에 제품과 인물, 정보, 슬로건, 일화 등을 인쇄한 카드가 유행한다.

대중 신문의 광고에 대한 인식

대중 신문 등장 시기인 1800년대 중반의 광고시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약품광고였습니다. 당시 광고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신문사조차도 재정적 수입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이런 인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알코올과 마약 성분을 통해 만든 만병통치약 표방 특허 약품 광고입니다. 한번 복용하면 끊을 수 없는 이 약품에 대해 일부 신문과 잡지가 광고 게재를 거부하기도 하면서 광고의 윤리성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리디아 핀컴(Lydia Pinkham)이 나왔습니다. 리디아 핀컴은 당시 트레이드 카드, 신문광고, 포장용기 레이블 등 모든 도구를 활용하여 엄청난 판매 신장을 기록합니다. 그는 전문 광고인은 아니었지만 소비자 대상을 선정하고 미디어를 선택하고 광고 슬로건을 개발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합니다. 리디아 핀컴은 넉넉하게 광고료를 지급한다는 조건을 걸고 종합 야채정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싣도록 유도하고 심지어 사설을 쓰도록 했습니다. 당시에 사용되던 카피들입니다.

“여성의 마음은 여성이 압니다. “

“여성의 건강은 인류의 희망입니다.”

“남성은 여성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리디아 핀컴은 당시 트레이드 카드, 신문광고, 포장용기 레이블 등 모든 도구를 활용하여 엄청난 판매 신장을 기록했다.

잡지의 출현

대중 신문이 등장한 시기에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잡지가 등장합니다. 잡지의 성장에는 인쇄 기술, 크로모리토그라피, 삽화, 사진의 발명 등이 기여했습니다. 처음에는 페니 프레스처럼 선정적이며 흥미로운 뉴스를 다루다가 점차 여러 문제를 고발하고 폭로하는 폭로 저널리즘 미디어로 정체성을 확보하고 신문이 할 수 없는 탐사보도 쪽의 내용을 제공합니다.

잡지는 좁게는 독자들이 사서 읽는 정기간행물의 하나를 뜻하나, 넓은 의미로는 이러한 정기간행물을 매체로 하는 모든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나 현상을 말합니다. 잡지, 즉 영어로 ‘매거진(magazine)’이라는 말은 ‘창고(倉庫)’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마치 창고와 같이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어의 매거진이라는 단어는 본래 상점(商店)을 뜻하는 프랑스어 ‘마가젱(magasin)’에서 온것으로서, 잡지는 프랑스의 서적상들이 자신의 서점이 보유한 서적들의 목록을 고객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발간한 일종의 도서목록집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매거진’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31년 영국에서 창간된 ‘젠틀맨스 매거진’(Gentleman’s Magazine)이라는 잡지에서 비롯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잡지’라고 번역해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중국에서는 1862년 ‘중외잡지(中外雜誌)’가 나오면서, 그리고 일본에서는 1867년 야나가와 순조(柳河春三)가 창간한 일본 최초의 잡지인 ‘서양잡지(西洋雜誌)’가 나오면서 잡지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잡지 정의는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모트(Frank L. Mott)는 “정기적으로 간행되며 다양한 읽을거리를 포함한 제본된 팸플릿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는가 하면, 월슬레이(Roland E. Wolseley)는 “일반독서대중을 대상으로 한 기사·소설·시·사진 등의 잡다한 내용이나 또는 특정한 취미·관심·직업 등을 가진 집단 및 특정의 연령집단을 대상으로 한 특수내용을 포함한 정기간행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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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이란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31년 영국에서 창간된 젠틀맨스 매거진(Gentleman’s Magazine)이라는 잡지에서 비롯됐다.

사진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Le_Bon_March%C3%A9
  • http://john-adcock.blogspot.kr/2012_05_01_archive.html
  •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_Civil_War
  • http://historyofadvertising.tumblr.com/post/85820988029/charles-havas-founded-the-first-international
  • https://en.wikipedia.org/wiki/Lydia_Pinkham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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