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세기, 미국의 신문과 광고의 발달

17세기 미국과  『런던 가제트』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100년이 지난 시기인 1535년에 스페인인이 멕시코 인쇄기를 들여와서 북미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법령이나 종교에 대한 인쇄물을 책으로 인쇄하였다. 그 책들 중에 『성 존 크레머커스의 정신적 발자취』 이 있었다. 미국에는 1638년에 케임브리지의 하버드 대학에 인쇄기가 기부되어 맨 처음 인쇄한 것은 『자유인의 맹세』이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것은 영국에서 1665년 창간되어 발행되던 『런던 가제트』(London Gazette)였다.

『런던 가제트』는 1605년에 창간된 『옥스퍼드 가제트』가 그 전신이다. 1665년 4월부터 런던에서 페스트가 유행하자 찰스 2세는 옥스퍼드로 피신하였는데, 런던에서 보내오는 신문에도 감염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여 국비를 들여 『옥스퍼드 가제트』라는 신문을 만든 것이다. 1666년 페스트의 종식되면서 신문사가 런던으로 옮겨 2월 5일 『런던 가제트』가 되었다. 이 신문은 현재까지 왕실 기관지로서 계속 발행되고 있는데 기존의 신문들이 팜플렛 형태였던 것과는 1매 2페이지, 좌우 2단 조판을 채택하고 뉴스에 중점을 두는 등, 영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볼 수 있다. 영국의 식민지 였던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해가  1787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너무 당연한 사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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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것은 영국에서 1665년 창간되어 발행되던 『런던 가제트』였다.

미국 최초 신문,  『보스턴 뉴스레터』과 신문 광고

미국 최초의 신문은 1690년 9월 25일 보스턴에서 벤저민 헤리스(Benjamin Harris)가 발행된 『퍼블릭 어커런시스』(Publick Occurrences)이었다. 하지만 허가를 받지 않고 출판했다는 이유로 1회만 발행되었다. 이 신문의 3면에 프랑스 왕이 아들을 성희롱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에 묶여 머리와 손가락이 잘리고 내장이 파헤쳐진 남자 시체의 사진과 기사와 함께 하녀를 농락한 가톨릭 신부에 대한 기사도 실려 있었다. 결국 첫호만 내고 이 신문은 폐간되었다.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간행된 최초의 신문은 『보스턴 뉴스레터』(Boston Newsletter)이다. 발행인 존 캠벨(Jhon Cambell)은 서점을 경영하는 한편 우편 사업도 맡고 있었다. 캠벨은 서점에 모이는 사람들이나 항구에 들어온 선백의 선장들로부터 여러 가지 뉴스를 수집하여 그것을 적은 뉴스레터를 뉴잉글랜드의 몇몇 식민지 및 기타 식민지의 지사와 공인들에게 보냈다. 이 주간신문에는 영국과 유럽의 정치 뉴스들로 구성되었으며 선언문, 공식 서신, 법원 판례, 해적 소식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신문은 그후 무려 72년간 발행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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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공식적으로 간행된 최초의 신문은 『보스턴 뉴스레터』(Boston Newsletter)이다.

17세기 신문이란 미디어가 처음 활성화되던 시기의 신문 광고의 유형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뉴스에 아주 가까운 형태로 어떠한 상품이나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신문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발견되고 있으며 현재에도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신문 독자들에게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가 필요를 느끼도록 설득하고 자극하는 형태이다. 신문의 초기 역사에서조차 신문 광고는 신문사의 주요한 수익원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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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뉴스레터』에 실린 여성병에 대한 약품 광고 사진

 『뉴잉글랜드 커런트』와 『뉴욕 위클리 저널』, 그리고 통광고의 등장

18세기 들어 제임스 프랭클린(James franklin)은 1721년 『뉴일글랜드 커런트』(New England Courant)를 창간한다. 프랭클린은 ‘독자와 관계 없는 개인적인 논쟁’이 되는 광고 게재를 거절했으며 일반 광고에 대해서는 인쇄인(신문 발행인)에게 최종적인 책임이 있음을 확실하게 밝혔다. 또한 자신이 반대하는 정책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이서 보스턴에 퍼진 천연두의 에방접종 정책을 맹렬히 비판한 기사가 전해온다. 이러한 논조를 미국 최초의 신문 개혁운동이라고 설멸하기도 한다.

프랭클린은 『젠틀맨스 매거진』(The Gentleman’s Magazine)을 창간했다. magazine는 본래 창고라는 뜻으로 현재에도 프랑스어 magazine은 창고, 상점, 백화점과 같은 의미인데 편집인은 지식 창고라는 의미로 바꾸어 썼다. 뉴욕에서는 1725년 11월 뉴욕에서 최초의 신문 『뉴욕 가제트』(New York Gazette)가 창간되어 영국 소식을 중심으로 항구에 입출항하는 배를 제시하게 보도하였다.
존 피터 젠저(John Peter Zenger)는  『뉴욕 위클리 저널』(NewYork Weekly Journal)을 창간하였는데  이 신문은 영국의 식민지 총독을 윌리엄 코스비(William Cosby)를 비난하는 기가를 실어 명예훼손 협의로 잽판을 받기도 했다. 젱거의 변호사는 ‘진실을 말하고 기록함으로써 독단적인 권력자에 대해 폭로하고 반대할 수 있는자유의 명분’이 수호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변호를 남겼다. 이 신문은  2단 통광고라는 최초의 대형 광고 방식을 처음 선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신문 광고의 형태로서의 통광고는 1753년 휴게인의 『뉴욕 머큐리』( New York Mercury)가 지면 6면 중 5면을 광고로 채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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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피터 젠저(John Peter Zenger)는 『뉴욕 위클리 저널』(NewYork Weekly Journal)을 창간하였는데 2단 통광고라는 최초의 대형 광고 방식을 처음 선보였다. 사진 속 삽화는 5단 책 광고인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의 커피하우스

1754년 『펜실베니아 저널』의 소유주 윌리엄 브래드포드 3세가 뉴욕에서 만든 커피 하우스가 미국 최초의 상인 거래소가 되었다. 커피하우스에는 미국 각지의 신문은 물론 런던 신문이 갖춰져 있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수출입 물품을 취급하는 상인은 선박의 입출항 소식을 가능한 빨리 알 필요가 있어서 커피하우스에는 선박의 입출항 속보를 기록하는 판이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영국처럼 커피하우스가 신문광고를 중계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우편국장이 신문 광고 및 신문 예약을 중계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특징적인 것은 운문으로 광고를 쓰는 스타일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운문처럼 행을 나누어 광고를 쓰는 방식인데 오늘 날 미국 광고의 전통이 되었다. 또한 문자를 흥미 위주로 레이아웃 하는 것도 당시의 새로운 아이디어였다.

18세기 미국 신문의 광고 레이아웃과 삽화 그리고 글꼴 크기를 적절하게 구성하는 레이아웃을 발경할 수 있다.

18세기 미국 신문의 광고 레이아웃과 삽화 그리고 글꼴 크기를 적절하게 구성하는 레이아웃을 발경할 수 있다.

19세기 초, 페니 프레스의 출현

1830년 1센트 신문(penny press)의 출현이 신문 근대화의 전환기로 평가된다. 시민과 노동자들이 신문을 구매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격이 형성됨에 따라 신문이 최초의  매스미디어(massmedia)로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미국 신문업계와 관련한 당시 미국의 변화를 살펴보면 1800년에 수도가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이전하고 뉴욕이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1830년에 루이지애나 지역을 프랑스로부터 매입하여 저널리즘이 서부로 확대되었으며 미국은 1848년 멕시코와 싸워 캘리포니아 지역을 획득한다. 이 시기 미국의 신문 종수는 260종에서 1200종으로 증가한다.

미국에서는 1센트 신문을 페니 프레스라고 불렀는데 1센트 신문은 미국이 당시 대공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산물이다. 1센트 신문의 시작은 1830년 7월 보스턴에서 창간된 린드 L. 윌터의 『데일리 이브닝 트랜스크립트』였다. 1센트 신문이 최초로 성공한 것은 벤자민 L. 데이의 『선』(The Sun)이다. 『선』은 “광고가 늘어나면 지면을 눌리지만 신문 가격을 올리지 않는다.”는 사고(社告)를 내고 “선불로 연간 계약을 하지 않는 광고를 싣지 않겠다”라는 방침을 밝혔다. 데이는 신문의 가두 판매 소년들에게 100부에 선불하면 60센트, 후불하면 75센트에 신문을 넘겼기 때문에 소년들은 점차로 선불을 선택하고 소년들은 예약자에게 신문을 배달해 주고 1주에 6센트를 벌었다.

출처_Wikipedia

페니 프레스는 시민과 노동자들이 신문을 구매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격이 형성됨에 따라 신문이 최초의 매스미디어(massmedia)로서 거듭날 수 있게 만들었다.

대중적 신문 시대와 전국 광고의 본격화

뉴욕의 『데일리 애드버타이저』 , 『커머셜 애드버타이저』, 『머컨틸 애드버타이저』 등의 상업지가 지명도가 높았으며 이 시대 미국은 상업 신문과 정치 신문의 색채가 분명히 했다. 보통 신문은 지면의 반 정도가 광고였는데 산업 신문 가운데는 80~90%까지 광고로 채워진 것도 있었으며 광고에는 간단한 컷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광고주를 미국에서는 내셔널 애드버타이저(national advertiser)로 불렀다. 1801년에 창간된 뉴욕의 『이브닝 포스트』 는 문예적인 성격의 신문으로서 “독자에게 신문 용지를 공급하는 것은 광고주이다”라고 신문에 광고 수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극장과 복권의 광고를 거절가나 경영주의 원칙에 따라 사기 의약품 광고를 싣지 않는 『저널 오브 커머스』 등도 있었다.

제임스 고든 베넷은 1835년에 『뉴욕 헤럴드』를 창간하여 경제란의 효시하고 할 수 있는 특색을 갖추었다. 베넷은 2주간 이상의 연재 원고가 아니면 받지 않았고 사기 의약품의 광고는 물론 광고비만 지불하면 어떤 광고라도 게재하였다. 그는 인터뷰 형식의 기사를 창시하였다. 1834년 11월 『선』 은 날마다 1만부를 발행했고 1836년 연간 2만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부수도 3만 부로 늘린다. 1840년에는 미국 전체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1631종이었으며 10년 후인 1850년 통계에 따르면 일간과 주간 신문의 총수는 2302종으로 1주일에 500만부를 인쇄했다.

뉴욕의 신문업계는 1841년에 『뉴욕 트리뷴』 을 창간했다. 트리뷴이란 말은 민중의 도덕, 사회, 정치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1센트 신문이 보이는 부도덕하고 창피스런 경찰 기사와 광고 등을 게재하지 않는다. 1840~50년대에는 『뉴욕 헤럴드』가 베넷의 분투로 『선』 에 근접하였다. 1838년 1월 새무얼 모스(Samuel Morse)가 전기식 통신으로 최초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처음에 전신은 신문에 이용되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여 신문사들 간에 뉴스 교환이 이루어졌다. “뉴스가 뉴스인 동안에 읽게 한다”라는 새로운 저널리즘이 탄생한다.

지하 신문과 소수 집단을 위한 신문의 출현

식민지이던 시대 미국에서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인지를 붙여야 했다. 영국의 허가가 없이는 발행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787년이전이 1765년 즈음부터는 인지를 붙이지 않고 발행하는 신문들이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불법으로 발행된 신문들은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 신문들에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배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주장들이 실렸다. 흑인 윌리엄 호지스(Willis A. Hodges)는 흑인 목소리를 담기 위한 신문으로서 『램스 혼』(The Ram’s Horn)를 창간했으며 노예 출신인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가 편집인 역할을 맡았다. 물론 1년에 2500부 정도 판매되었지만 소수 집단을 위한 신문으로서 의미있는 출발로 볼 수 있다.

페니 프레스 시대에 여성만을 위한 신문들이 생겨났다. 1834년의 『우먼』(Woman), 1836년의 『레이디 모닝 스타』(Ladies’ Morning Star)이다.  하지만 판매 부수는 2000부 정도로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여성이 신문 편집과 제작에 참여하는 것도 신문을 구매하는 데도 제한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최근에서야 달라지고 있지만 신문는 남성 중심적 분야이다.  안타깝게도 국내에서조차도 잡지를 제외하고는 여성 신문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은 다양하지만 일관된 현상으로 보여진다.

Frederick Douglass, ca. 1879. George K. Warren. (National Archives Gift Collection) Exact Date Shot Unknown NARA FILE #: 200-FL-22 WAR & CONFLICT BOOK #: 113

노예 출신인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는 흑인 목소리를 담기 위해 창간된 신문인 『램스 혼』(Ram’s Horn)의 편집인 역할을 맡았다.

사진 출처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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