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문자미디어, 점토판과 파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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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출현과 점토판의 사용

인류의 가장 오래된 미디어는 ‘말’(language)이며, 인류가 영원히 사용할 미디어 이기도 하다. 인간이 지닌 최소한의 소통 방식이자 최후의 소통 방식이라는 뜻이다. 인류가 사는 곳이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상태가 된다면 ‘말’은 더 이상 인류의 미디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말’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리 기호로서 인류가 처음 사용한 메시지 전달방식이자 영원히 사용할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동물들 가운데도 여러 형태의 목소리와 억양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이 많이 있지만, 인간은 목구멍 벽과 혀뿌리를 마찰하여 내는 소리(喉頭音)을 분명하게 발음하여 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입으로 하는 언어로 발성하는 목소리 조절법을 습득하여 사용한다.

하지만 말은 목구멍을 통하여 나타나는 소리라서 그 장소 그 시간에서만 들을 수 있다. 문자는 말을 기록하기 위해 생겨나거나 만들어졌다. 뜻이나 소리와 결부되는 기호와 상징을 돌, 진흙, 나무와 같은 물체의 표면에 기록하면서 문자가 탄생한다. 그림으로 된 기호를 쓰거나 사물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약속된 뜻을 전했을 것이다. 그림기호나 그림문자는 미적인 의도로 꾸며 만드는 그림과 가르게 단지 의사전달을 중시했다. 그림기호는 사실 및 사람이나 사물을 확실하게 구별할 목적으로 쓴 기호이다. 어떤 기호와 사물 사이에 상관관계가 세워지면 점점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사물은 말로 이름이 있기 때문에 글로 쓰인 기호와 그에 대응하는 이름 사이에도 상관관계가 만들어진다.

말을 기호로 표현할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사람이 사자를 죽이는 사건을 기록할 때 더이상 사람이 손에 창을 들고 사자를 죽이는 모습의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에 ‘사람’과 ‘죽였다’와 ‘사자를’을 나타내는 관습적인 기호 3개를 써서 ‘사람이 사자를 죽였다’라는 말을 기록할 수 있었다. 같은 식으로 ‘5마리의 양’을 기술(記述)하는 방법으로 5마리 양을 따로따로 그려야 할 것을 그 두 단어와 대응하는 기호 2개를 써서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文字)는 말 또는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상징 체계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문자가 없었다면 인류의 지식과 생활들이 작성되어 전달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문자는 기원전 3천년 경에서부터 기원후 1세기경까지 많은 언어의 문자로 사용된 쐐기문자(cuneiform script. 설형문자)이다. 설형문자로 작성된 최초의 문서는 BC 3000~1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칼데아(Chaldea) 주민들이 사용하던 수메르어로 씌어졌다. 고대 도시 우루크 유적에서 발견된 이 문서는 상형문자 양식의 설형문자로 작성되었으며 사물은 그림으로, 숫자는 짧은 선이나 원의 반복으로, 고유명사는 수수께끼 풀이원칙, 즉 그림을 그것이 묘사하는 대상물이 아니라 통상적 발음에 따라 해석하는 방식을 바탕으로 한 그림의 조합으로 표시했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책의 기원”이라고 부르는 점토판과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문자가 기록된 현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점토판이나 석판에 남겨진 것들이다. 최초의 책의 기원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과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대략 BC 30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BC 2600 수메르의 쐐기문자판. 출처_staticflickr

BC 2600 수메르의 쐐기문자판. 출처_staticflickr

메소포타미아는 지리학상 중동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주변으로 현재 이라크 주변  지역을 일컫는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기원전 약 6000년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정착 주거하기 시작한 이래 점차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강의 범람이 불규칙적이고 잦아서 치수와 관개 등 대규모 사업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러 도시 국가가 나타나고, 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

강의 하류는 강물에 운반된 흙과 모래가 쌓이면서 삼각주를 뜻하는 델타(delta) 지대를 이루어, 두 강에서 갈라지는 수많은 지류와 소택지(沼澤地), 개펄이 넓게 발달되어 있다. 고대 수메르인,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 히타이트인들은 깨끗한 진흙으로 점토판을 만들었다. 점토판의 진흙이 굳기 전에 철필로 설형문자를 새기고 햇볕에 말리거나 가마에 넣고 구워 만들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햇빛에 말리기만 했다면 점토판은 부서지기 쉬웠을 것이다. 따라서 점토판을 불에 굽는 방법을 사용하였을 텐데, 그렇게 하면 일부러 부수려고 하지 않는 한 좀체로 닳거나 손상되지 않는다. 덕분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세계 최초의 문자 기록을 남긴 수메르인들의 쐐기 문자의 점토판을 발견할 수 있었고 우리들은 박물관과 인터넷을 통해 기원전 7천년 경의 점토판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메르(Sumer)는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으로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으로 아직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곳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기원전 6천년경에 청동기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농경생활을 하는 국가가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메르인은 대략 기원전 7천년부터 이 지역에서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3천년경에 크게 번성하였다. 발견되는 점토판을 통해 이 방법은 그후로도 2,000년 동안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점토판의 쐐기문자들이 해독되면서 수메르 문명의 일부가 파악되고 있다. 그 내용들 중에는 대사제 라가시(Lagash)가 왕 우루카기나(Urukagina)에게 보낸 편지가 있어서 그의 아들이 전사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생활을 기록한 점토판이 있는가 하면 홍수 이야기와 노아 방주, 인간 창조, 바벨탑에 대한 내용도 있어서 많은 연구자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나 소아시아에서 출토된 점토판 기록의 분량이나 특질로 볼 때 제작자들은 보존력을 매우 중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점토판의 대부분은 개개인의 상거래 관련 서류와 국가의 문서들이다. BC 6세기경 아랍어와 알파벳이 등장하면서 사용하기에 훨씬 더 간편한 파피루스가 차츰 점토판을 대체하게 되었다.

종이와 비슷한 최초의 재료, 파피루스

파피루스(papyrus)는 고대 그리스어로는 파피로스(papyros)인데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종이와 비슷한 재료로서, 같은 이름의 갈대과의 식물 잎으로 만든다. 파피루스 식물의 학명은 싸이페루스 파피루스(Cyperus papyrus)인데 보통 2~3m의 크기로 자란다. 현재에는 수단 지역의 나일강 상류에만 서식하고 있으나 고대에는 이집트 통치 지역 전역에 무성하여 이집트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줄기는 문서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물, 매트, 상자, 샌들, 작은 배의 재료가 되었으며 묶어서 건축용 기능으로도 쓰였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그중 문서를 위한 재료로도 사용되었던 셈이다. 파피루스는 종이와 재질이 유사하여 점토판과 비교해 볼 때 현대적인 책의 직접적인 원조라 할 수 있다.

시라쿠사(Syracuse) 근처의 파피루스 숲. 출처_Wikipedia

시라쿠사(Syracuse) 근처의 파피루스 숲. 출처_Wikipedia

파피루스로 문서 재료를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종이처럼 만들 때는 겉껍질은 사용하지 않는다. 식물 줄기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껍데기를 벗긴 줄기 속의 부드러운 부분을 얇게 잘라 4~6장 정도 만든다. 가로로 주욱 한 번, 세로로 다시 한 번 겹쳐 뒷면을 세로로 놓고 전체를 강하게 두들겨 가로와 세로를 겹쳐서 물에 담가두면 자연스럽게 고무즙이 스며들어 서로 밀착된다. 파피루스에 삼베 같은 느낌의 무늬가 생기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이것을 물속에서 꺼내어 무거운 것으로 누른 채 햇빛에 건조시키면 얇은 종이 형태가 된다. 이 방법으로 보통 20여 장의 사각형 파피루스를 하나로 이어 두루마리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여기에 목탄이나 나뭇가지를 섞어 만든 액체와 갈대 줄기를 비스듬하게 깎아 만든 필기 도구로 문자와 그림을 새겼다고 한다. 파피루스는 점토판이나 양피지에 비해 내구성이 약했으나 주변에서 손쉽게 재료를 구하기 쉽고 가격이 싸다는 점 때문에 애용되었다. 점토판에 비해 파피루스는 보다 더 쉽게 파손되는 약점이 있었으나 BC 2500년 전의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전혀 손상되지 않고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때문이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많이 보존될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으로는 이집트의 장례식 풍습을 들 수 있다. 내세(來世)를 강하게 믿었던 이집트인들은 사자를 지하세계로 안전하게 인도하기 위해 관뚜껑과 무덤의 벽에 주문을 새겨넣었고, 이러한 공간이 부족할 때는 주문을 적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함께 매장했다

나일강 삼각주에는 이 식물이 풍성하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인들이 최소한 초대 왕조 이전에 파피루스의 사용법을 개발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파피루스를 재료로 책 이전 형태인 코덱스(codex. 책 같은 형태의 고문서)를 만들었기 때문에, 파피루스라고 부른다. “Papyrus”라는 단어는 영어 단어 페이퍼(paper)의 어원이다. 현재 발견되는 파피루스 문서에서는 명령, 보고, 회계, 의학, 기도문, 세속 문학, 설계도 등이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다양한 그림이 텍스트와 함께 작성된 ‘사자(死者)의 서(書)’와 같은 종교문서도 있다.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 시대 관 속의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세계(死後世界)에 관한 안내서로서 파피루스에 그 교훈이나 주문(呪文)이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집트 왕들은 내세에도 최고의 신이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피라미드의 현실(玄室)과 벽에 주문과 부적을 새겨서 이것을 피라미드의 텍스트라고도 한다. 고대 이집트를 지나 중왕국 시대에는  귀족이나 부자의 관 속에 죽은 후의 행복에 관하여 작성한 것도 있다. 관구문(棺構文) 또는 코핀텍스트(Coffin Texts)는 고대 이집트 제1중간기 시대에 주술들이 쓰인 장례문헌들의 모음이다.

후에는 주문에 의지하여 내세의 행복한 생활을 얻으려 했으나, 현세에서 선행을 쌓지 않으면 내세에 갈 수 없다는 사상이 나타나 죽은 이에게 이 사실을 가르칠 문구를 파피루스에 작성하여 관에 넣었다.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와 영혼에 대해 삶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믿었다. 이 사고방식은 해마다 나일강이 범람하고 비옥한 축적지가 생기는 규칙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죽은 후에도 또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디 때문에 각족 주문이 담긴 ‘사자의 서’를 무덤에 지참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고대 이집트의 세계관과 역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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