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 인쇄와 지식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다

출처_위키미디어

출처_위키미디어

인쇄기를 발명하여 중세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지식 혁명을 촉발시킨 구텐베르크. 그의 발명은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성경과 지식을 독점하던 체계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는 믿었던 제자로부터의 배신과 동업자의 소송에 따른 파탄 그리고 노년에 찾아든 실명(失明)이라는 대가를 치뤄야 했다. 인쇄와 지식 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그였으나 더이상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독점과 어둠이라는 중세의 봉인을 해제한 행위에 대한 천형이었을까.

인쇄기라는 천재적 발명품을 만들어낸 구텐베르크의 파란 많은 삶은 사람들이 책을 읽으려는 욕구와 필요성과 결합하면서 14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와 종교개혁 그리고 18세기 프랑스대혁명의 여명을 밝혔다. 산업 혁명과 더불어 지식의 빅뱅으로 이어졌으며, 디지털 혁명과 함께 1992년의 구텐베르크 프로젝트(Gutenberg project)라는 이름으로 그의 존재가 부활되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책과 출판의 출발점은 독일 마인츠 출생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에서 시작된다. 인쇄기를 발명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천재성은 지금도 감탄을 자아낼 만한 것이지만, 『42행 성서(42-line Bible)』를 둘러싼 그의 파란 많은 인생은 8백년이 지난 세월에도 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숙연하게 한다.

10603671_1028716153823975_2254963729194668035_n

구텐베르크 시절 인쇄소 풍경(출처 : 위키피디아)

포도주 압착기를 이용한 인쇄기계의 발명

15세기 서양의 지식 혁명에 불을 지핀 주인공인 그는 포도주를 짤 때 사용하는 압착기를 개조하여 근대적 인쇄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를 “근대 활판 인쇄술의 발명자”로서 정의하는 것은 무리이다. 목판 인쇄는 중국에서 3세기경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14세기 들어 유럽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금속활자는 고려시대 이미 개발되어 경전을 인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위대함은 불편하고 번거로웠던 인쇄술을 기계식으로 개발하여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무거운 압착기 나사볼트를 이용해 활자판을 눌러 인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의 아버지가 금화를 제조하는 조폐국에서 일했다는 기록을 보아 압착을 하는 아이디어는 거기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금세공사조합에 가입해서 금속세공기술을 익혔다는 사실이 당시 자금거래 서류에서 나오고 있다. 1430년 마인츠의 조합측과 귀족계급 사이의 치열한 싸움의 와중에 이 도시로부터 추방된 그는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크로 갔다. 금세공사조합 기록에는 동업자들과 함께 보석세공과 거울 만드는 일을 하면서 많은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서 압착 기술의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면 금속세공 기술은 금속 활자를 개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활자판을 위한 각 글자를 한묶음으로 정밀하게 절단할 수 있는 주형틀도 고안했다. 당시에 개발되어 있던 합금 방식과 유성잉크 기술이 결합되어 구텐베르크의 인쇄 개발이 완성된 것이다. 놀랍게도 구텐베르크의 기계식 인쇄 방법과 원리는 옵셋인쇄(offset printing)가 출현하는 20세기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컴퓨터나 인터넷의 개발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기도 한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42-line Bible)』의 본문(출처 :위키미디어)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42-line Bible)』의 본문(출처 :위키미디어)

필사본의 아름다움을 손상하지 않은 『42행 성서』

구텐베르크는 마인츠로 돌아와 고향집에 1448년 인쇄소를 차렸다. 구텐베르크가 꿈꾸던 것은 중세의 전례(典禮)에 관한 필사본들을 그 색깔이나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전연 손상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재생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그는 1450년에 유력자인 요한 푸스트(Johann Fust)에게 돈을 빌려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부르는 『42행 성서』 출판 작업에 착수한다. 모두 2권에 총 1,272쪽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이 책은 180질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48질이 남았는데 상태가 완벽한 것은 21질에 불과하다.
오랜 필사 작업으로 만들어진 성경 66권 한 질을 사려면 집 10채 값에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성경은 수도원이나 교회만 소유할 수 있었다. 성경을 독점한 교회는 교리를 자신들 방식으로 해석하고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되고 사람들이 손쉽게 접하게 되었고 수도원과 교회의 교리해석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형성되었다. 인쇄기 개발이 종교개혁에도 바탕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1454년 푸스트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배한다. 이 소송에 대해서는 독일 괴팅헨(Göttingen)대학 도서관에 1455년 11월 6일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로 남아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푸스트가 승소했고 2번에 걸쳐 빌린 원금과 복리이자를 합한 2,026길더(guilder)를 갚으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인쇄기 한 대와 몇 가지 물건만 가지고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성서 출판 작업 사업에서 제외된다. 자신의 발명품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재정적으로 파산하게 된 것이다.

구텐베르크 인쇄로의 가장 숙련된 기술자였던 피터 쉐퍼(Peter Schöffer)가 구텐베르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으며 푸스트의 양자가 된 사실로 보아 투자자에게 사업을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파산한 구텐베르크는 1459년 밤버그(Bamberg)라는 도시에서 작은 인쇄소를 열어 성경 인쇄 작업에 계속했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 남기지 않아 그 후의 작업은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한 전기에 의하면 그는 말년에 이르러 거의 실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사회에 끼친 영향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인쇄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저렴해진 성경은 중산층들이 글을 배우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한 작가들은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출판을 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구텐베르크의 눈부신 발명품과 파란많은 인생 덕분에 유럽에서는 서적이 대량으로 인쇄될 수 있었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맞물려 유럽을 중세의 우매함과 암흑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소수가 독점하던 성경이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식으로 변화되었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기술은 구텐베르크보다도 앞선 것이지만, 인쇄물과 지식을 대중화하고 확산시키는 역할로 발전해나가지 못하였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인쇄술은 그가 살던 15세기 당시 유럽에 인쇄술의 혁신을 위한 관련 조건이 모두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다만 그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일 뿐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문자가 등장한 이후에 금속활자를 사용한 근대적인 의미의 책이 출현하는 데는 3,500년이 걸린 것이다.

15세기 인쇄기로 인쇄 책을 만드는 장면. 지금도 예술 제본이라는 영역으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Janet Ing, Johann Gutenberg and His Bible:A Histotical Study , 1988. Wipedia : Johannes_Gutenberg. Britannica
Johannes Gutenberg. John Man, The Gutenberg Revolution: How Printing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 Transworld Publishers, 2009.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