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와 중세 도시국가들의 전성시대

풍족하여 더 많이 모이는 곳, 고대 도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도시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산다. 하지만 인류가 역사에서 처음부터 도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105,000년 전부터 야생 곡물을 수확한 흔적이 있으며, 11,500년 전 초기 농부들이 나타나 작물을 경작하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초기 농경은 세계 11곳에서 따로따로 일어났다. 염소, 양, 소 등의 가축은 약 10,000년 전에 가축화되었다. 따듯한 집에서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들인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여야 한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는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을이 생겨났다. 농사에 계속 성공하여 먹을 것이 풍족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지리와 기후 환경이 안 좋아 사람들이 굶주리고 더 좋은 다른 땅을 찾아 떠나거나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투를 벌여야 하는 지역도 있었다.

고대 도시들이 자주 범람하여 토지가 비옥했던 나일강(Nile R.)이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그리고 황하(黃河)의 언덕에 주로 생겨나고, 대부분 성벽을 쌓아서 지켜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쳐들어오는 적들을 훤히 알 수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시기에는 강과 바다를 이용하여 물자를 이동시키고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발달할수 있었다. 나일강은 많은 비가 내리면 범람하고 다시 물이 빠지면 곡식이 무럭무럭 자랐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을 신처럼 숭배했다. 테베(Thebes)는 현재의 룩소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지방은 기원전 2100년과 1500년의 제11왕조와 제18왕조 이후 왕국의 수도였다. 나일 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국가 수호신이 된 아멘 신의 신전과 시민을 중심으로 하였고, 서쪽은 국왕과 왕족의 능과 묘 그리고 장제전(葬祭殿) 및 귀족의 묘와 같은 사후의 세계가 중심이 되었다.

자주 범람하여 주변 토지가 비옥했던 나일강이나 메소포타미아 언덕에 형성된 도시들

인간 무선 통신과 뉴스 증폭자의 활동

인류가 처음 말을 하기 시작한 이래로 지구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수많은 사회집단은 자신들의 구두 뉴스 전달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인공지성이 지배하는 2020년 지금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등의 오지의 원주민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연구 덕분이다. 선교사의 딸로 살았던 줄루족과 함께 살았던 새뮤얼슨(L.H. Samelson)은 300마일이나 떨어진 것으로부터 사람들의 입을 통해 줄루족 왕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구두뉴스 체계는 수만년에서 수십만년 전 언어가 발달하는 기초적인 수준에서도 작동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두 뉴스 전달 체계의 작동은 사회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상호작용이 활발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줄루족이 큰소리를 내는 슬픔의 표시를 새뮤얼슨은 인간무 무선 통신(human wirless telegraphy)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죽음을 대하는 다양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큰소리를 내는 공통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슬픈 소리를 내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따른  자신의 슬픈 감정을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연기를 피우거나 북을 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에게까지 소식을 알렸다.

큰 마을일수록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최근의 뉴스가 흘러넘쳤을 것이다. 모닥불 주변이나 우물가, 마을 광장, 시장 등. 지금도 그렇지만 문자 이전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소문에 열광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움직이면뉴스도 움직인다. 특히 시장은 광범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 커뮤니티 밖의 사람들도 모이는 곳이다. 돈을 주고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 뉴스는 더욱 무작위적으로 빠르게 전달되고 확산되면서 스스로 가치를 생산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뉴스는 공공재로서 태어났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많은 뉴스들이 상품 거래와도 관련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곳은 가뭄이 들어서 수확이 어렵고, 어떤 작물이 풍년이고, 사냥의 결과는 어떠하며, 누가 만든 물건이 아주 편리하게 사용되며, 누구는 경사가 나고 누구는 어려운 일을 겪었다는 내용이다. 뉴스는 상인이 판매 전략을 세우고 거래되는 상품에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뉴스와 상거래의 공생관계가 시장에서 형성된다. 안정된 사회는 여행자를 환대하는 풍습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상거래는 여행을 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면서도 뉴스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아프리카 지역에 살고있는 원주민 부족인 줄루족의 1900년 사진

 

규모가 큰 사회의 지도자들에게는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뉴스 전달 체계가 필요했다. 사회 커뮤니티에 위협이 될 만한 외부 소식과 수확 현황을 알고 부족장이나 왕은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하려고 했을 것이다. 새뮤얼슨의 연구에서 줄루족은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을 도용하여 왕의 뉴스를 전달하게 했다고 한다. 뉴스 전달자인 메신저(messenger)들은 왕의 뉴스를 가지고 왕궁의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는 추장들에게 파견되었다. 메신저들은 각 가정의 가정들에게 줄루족 왕의 뉴스가 분명히 전달되었는지는 확인했다고 한다.

시장과 광장에서 전달되는 뉴스는 흥미롭지만 신뢰할 수 없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테지만 이야기와 정보는 민주적으로 공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신저에 의한 뉴스 선택과 전파는 지도자와 지배 계층에게는 매우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뉴스는 권력에 기반하며 권위와 규율을 가지고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시장과 광장 뉴스와는 차이가 있다.전투에서 패배한 소식은 전하지 않고 승리한 소식만을 전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은 전달되지 못하도록 통제할 수 있었다.

미국의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20세기초까지도 공인된 뉴스 전달자가 있어서 메신저들이 죽음, 부족회의, 협약 등의 사건들을 전당했다고 한다. 이 메신저들은 1년에 2회에 걸쳐 봄과 가을에 뉴스를 수집하기 위해 부락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메신저들은 시장과 광장에서 지도자의 전파하고 싶은 뉴스를 큰소리로 외치며 전달했는데 이들을 뉴스 크라이어(news crier)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잘하고 목소리가 크고 또렷한 이들이 지배자와 비지배자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해주었다. 문자가 발명되고 파피루스와 양피지가 널리 사용된 이후에도 문자를 읽을 수 없는 대다수의 피지배 계급을 위해 뉴스 크라이어들이 활동한 기록들이 있다. 이 기록은 광범한 대중에게 소리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라디오가 등장하여 대중화된 20세기초까지 이어진다.

문자의 출현과 메소포타미아 지역 도시국가들의 성장

BC 8,000년경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점차 좋아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종류가 많아졌고 인구가 갑자기 증가한다. 석기 도구가 복잡하고 섬세해지면서 신석기 시대가 출현하고 주변 환경에서 더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 인류는 목축과 농경 생활 시작하여 정착 생활을 시작한다. 인구의 증가로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최초의 도시가 나타난다. 정책생활을 하는 농경사회가 본격화되면서 세분회된 분업이 이루어져 높은 효율의 기술적 진보를 가져왔다. 노동분업과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교환방식이나 상업이 필요했다.

조직화된 교환방식이 구석기시대 말에서 신석기시대초에 실행되었고 석기는 이동하는 수렵인들에 의해 금속은 유목민들에 의해 거래되었을 것으로 연구자들을 추축한다.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면서 관리를 위해 회계와 문자가 출현한다. 공동체에 필연적인 분쟁 해결을 위한 법이 만들어지고 성직자, 관리, 군인 같은 새로운 지배층이 나타난다.

강력하게 성장한 도시 국가가 다른 지역을 점령하여 제국으로 성장한 전형적인 사례가 아모리(Amorite) 왕조의 도시국가인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Babylon)이다. 바빌론은 현재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지역에 있었는데 한때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여서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들끓었다. 이 지역에 작은 도시들이 생겨난 것은 기원전 4000년 경 부터인데 바빌론 말고도 수메르인계의 도시였던 우루크(Uruk), 니푸르, 니네베 등이 있었다.

바빌론은 수무아붐(Sumuabum) 왕이 BC 1894년에 세운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지닌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고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따라서  이집트와 달리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한 명의 왕이 지배한 적이 거의 없었다.

페르시아만 주변 평지의 기원전 3100년경의 폐허더미에서는 부드러운 점토에 글을 새겨 가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점토판들이 발견된다. 이 점토판들에는 괴물과 용을 물리친 영웅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여러 왕들의 업적을 칭송하거나 사원을 지은 사실들, 이민족들을 복속시키는 과정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상인들의 보고서, 계약서, 보증서, 상품목록이 담긴 점토판도 발견된다. 이집트인들처럼 화려한 그림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점토판을 만든 바빌로니아인들은 셈에 능하고 근면하고 공정성에 대한 의식이 분명한 상업 민족이었을 것이다.

부조된 함무라비 법전과 함무라비. 함무라비는 BC 1792년부터 1750년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빌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키웠다.

바빌론이 유명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가 함무라비 왕의 법전이며 또 하나는 공중 정원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1792년에서 1750년에 바빌론을 통치한 함무라비 왕이 반포되었는데,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교역과 도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협약이자 규칙이 지닌 특징을 지닌다. 아카드어가 사용되어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우르남무 법전 등 100여년 이상 앞선 수메르 법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바빌론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회적 관계와 교역이 얼마나 활발하고 복잡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흥미로운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못된 짓을 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가 용서해 주지만 두 번째로 나쁜짓을 하면 아들을 내쫓을 수 있다.
도둑이 소나 양, 당나귀, 돼지, 염소중 하나라도 훔쳤더라도 그 값의 열 배로 보상해 주어야 한다. 도둑이 보상해 줄 돈이 없다면 사형당할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 자신의 눈알을 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의 이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렸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릴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게 되었다면 의사의 손은 잘릴 것이다.
건축가가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무너져 주인이 죽음을 당하면 건축가는 사형에 처한다. 만약 집주인의 일가족이 죽었을 경우에는 목수의 가족중 해당되는 이가 죽어야 한다.
강도가 어떤 집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면 그 구멍 앞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을 사형에 처할 만하다고 하여 고소하고도 이것을 입증할 수 없다면, 고소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궁중의 남녀 노예 혹은 자유민의 남녀 노예를 성문 밖으로 도주시킨 자는 사형에 처한다.
만약 새로이 아내를 들이고도 그에대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인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
어느 노예라도 그가 주인에게 “이 자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주인은 자기 소유의 노예임을 입증하고 그 귀를 자를 권리를 가진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두 손을 자른다.

6대 왕인 함무라비(Hammurabi, BC 1792~1750)는 재위 초기에는 유프라테스강의 치수 사업에 집중합니다. 이 작업은 하류 지역 도시국가들과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주변 도시국가들을 정복하고 남부 메소포타미아 전부와 아시리아의 일부를 합한 왕국을 건설해 바빌론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남은 재위기간 내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국가가 영토국가로 성장하는 전형적인 과정입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공중정원은 바빌론 왕궁 안에 높이 25m, 5단 계단으로 된 테라스에 흙을 묻은 다음물을 끌어올려 아래로 흘려 보내는 식으로 물을 공급하며 나무, , 꽃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유적으로 판단하면 가장 윗단의 넓이만도 60평방미터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많은 물을 끌어올려 공중정원을 유지했을까 하는 점이다. 전설에 따르면,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인류의 영광’이라 불리는 궁전 바로 옆에 세워졌다. 이는 당시 왕비였던 ‘아미티스’가 고향의 울창한 녹음과 수목들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그녀를 위해 지었다고 알려졌고, 이같은 설화는 바빌로니아 신관 베로수스에 의해 기록되어 후에 유대인 요세푸스에 의해 인용되었다. 

바빌론 공중정원은 왕궁 안에 높이 25m, 5단 계단으로 된 테라스에 흙을 묻은 다음 물을 끌어올려 아래로 흘려 보내는 식으로 물을 공급하며 나무, 풀, 꽃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바빌로니아인이나 훗날의 아시리아인들은 태양과 달, 그리고 여러 별들을 신으로 모셨고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별이 일정한 궤도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어떤 행성들은 행운이나 불행을 하져온다고 믿었고 몇 개의 신성한 행성들에 하루씩을 헌정한다. 신성한 별들은 태양과 달을 포함하여 7개였다. 해의 날(일요일), 달의 날(월요일), 화성(마르스), 수성(메르쿠리우스), 목성(주피터), 금성(베뉴스), 토성(사투르누스)라고 불렀다. 우리가 요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바빌로니아인과 아시리아인들이 별을 관찰하여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도시국가 시대와 뉴스

고대시대의 중국 한(漢)나라, 로마, 이집트 같이 거대한 지역을 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제국(empire)이라고 한다. 로마의 사례처럼 고대 제국들도 처음에는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여 다른 지역과 민족을 점령하여 왕이나 황제가 지배하는 국가를 만든다. 하지만 모든 도시국가가 제국으로 발전해간 것은 아니었다.  로마와 중세,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에따라 적고 많은 도시국가들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지역은 도시국가들의 무대였으며 도시국가들이 상황에 따라 연맹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제국의 역할을 감당했다.

고대시대에는 유럽, 중근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 광범하게 도시국가들이 활동했던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도시국가들에는 공통적으로 도심 한복판에 신전(神殿)이 있으며 성벽과 도시 시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도시국가로서 중요한 점은 자유로운 권리를 지닌 시민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도시국가라는것은 말하자면 세계 역사상 하나의 특수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도시국가는 고대의 씨족과 부족 사회가 국가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작은 지역의 독립된 국가를 이루었으며 성벽에 둘러싸여 상업의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스 지역의 도시국가의 형성 기원은 논란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부족 집단들이 BC 1000~800년 그리스 반도(半島)와 에게 해의 섬, 소아시아 서부에 정착하면서 도시국가의 형태를 이루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해외로 이주민을 보냈고 도시국가의 경제활동을 보완하는데, 그 결과 대략 BC 750~550년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비슷한 도시국가들이 세워졌다.

이 때 세워진 수천 개의 도시국가들은 군주제, 공산주의, 직접 민주주의 등 다양한 정치제도를 실행하고 있었다. 경제 활동을 주도하는 시민들이 공업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플라톤(Platon)과 소크라테스(Socrates),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등 오늘날에도 유명한 철학자들이 등장합니다. 강력하고 자유로운 시민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기반으로 역사에 남을 철학, 학문, 예술이 꽃을 피웠던 것입니다.

자유 권리를 지닌 시민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도시국가를 폴리스(Polis)라고 부릅니다. 폴리스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는 산과 섬이 많은 환경과 농업보다는 교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리스인들의 특성 때문에 통일된 국가보다는 지역별로 도시국가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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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광장은 자유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모여 재판, 집회, 사교, 공연을 위해 사용되던 광장입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아고라 광장은 자유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모여 재판, 집회, 사교, 공연을 위해 사용되던 광장입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사회의 통합과 결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집단 정체성(group identity)이 중요하다. 개인들이 자신의 기억, 영감, 가치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 정체성은 지리, 민족, 공통경험에 의해 형성되며 역사, 예술, 종교에 의해 보존된다. 집단으로서의 사회는 공통적인 관점과 느낌, 인식과 감정의 연속적 흐름에 존재하며 구성원들에게 사회의 존재와 중요성을 매일  알리고 확인시키려고 한다. 뉴스는 이러한 공통된 경험과 사고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스 폴리스의 한복판 산 언덕 위에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는 성채가 있고 그 안에는 신전을 지었다. 성채는 성을 쌓지 않아도 되는 험준하고 울퉁불퉁한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그 아래에는 시민들이 재판, 집회, 시장, 사교, 공연 장소로 이용하던 아고라(agora)라는 광장이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도시국가의 뉴스와 극장 뉴스를 동시에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폴리스는 그리스 본토에 100여 개, 식민지까지 합하면 1,000여 개가 넘었고, 그 규모는 다양하여 인구가 작게는 수천에서 20~30만 명에 이르렀으며, 평균 인구는 5,000명 정도였다. 주변의 촌락과 농장에서 식량을 공급받던 도시국가들은인구가 증가하면 경작 면적과 식수 공급 그리고 건축 부지에서 한계를 드러냈으며 따라서 다른 지역에 식민 도시를 건설했던 것이다. 결국 물과 식량이 도시의 성장 억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스 도시국가를 기준으로 볼 때 폴리스는 ① 외부에 대한 정치적 독립, ② 내부에서의 자치, ③ 경제적인 자급자족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이 조건들을 완전하게 그리고 장기적으로 지키고 있던 전형적인 도시국가가 스파르타, 아테네, 로마 등이었습니다. 시민은 국내 재류외인(在留外人), 노예, 피지배공동체와 명확히 구별되는 존재였습니다

BC 5세기 중엽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인()의 자식이 아닌 자는 시민이 될 수 없다고 정한 것과, BC 5세기∼BC 4세기아테네에서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를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는 것은 도시국가의 폐쇄적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시민들은 토지와 노예를 소유하였으며, 전쟁과 정치에 전념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시민의 총회인 그리스의민회(民會), 로마의 병원회(兵員會)와 평민회(平民會)야말로 도시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과 학문의 기반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고대 도시국가의 이같은 환경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직접민주주의라고 하지만 평등사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로마와 이탈리아의 동맹 도시들간의 전쟁인 동맹시전쟁 후 도시 자치권이 무너지고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주민에게 부여함으로써 도시국가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사진은 동맹시전쟁을 기념한 로마 주화.

로마와 이탈리아의 동맹 도시들간의 전쟁인 동맹시전쟁 후 도시 자치권이 무너지고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주민에게 부여함으로써 도시국가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사진은 동맹시전쟁을 기념한 로마 주화.

고대 도시국가 전성시대의 종말과 중세 도시국가의 부활

도시국가는 주변의 영토를 넓혀 발전하기도 하였지만, 고대 그리스는 원거리를 항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대체로 같은 모양의 지중해의 다른 지역에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토 국가로 성장한 로마와 달리 그리스의 식민시는 모시(母市)로부터 독립한 도시국가였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어떤 도시국가도 영토국가로서 발전하지 못했으며, 토지를 소유한 시민층이 몰락하고 시민병제가 붕괴되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국가들은 분리주의와 배타성이 강하여 도시국가들간의 연맹도 지속적인 것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영구적인 연합이나 동맹을 만들지 못해 채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BC 4세기 후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Philip II of Macedon)에게 점령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주로 문자 메시지와 메신저를 통해 정복한 국가와 연락을 유지했다. 그는 자신이 건설한 광할한 제국을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페르시아 지역을 정복하는 동안에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지만 많은 한계가 있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지중해의 다른 도시국가들은 같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여 영토 국가로 빠르게 성장한 페니키아인의 카르타고(Carthago)와 라틴족의 로마(Rome)에 점령되면서 그리스의 도시국가 전성시대는 끝나기 시작했다.

로마의 공화정 말기에도 도시국가의 제도를 남기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적 도시국가가 아니면 운영이 불가능한 시민 직접 민주정치 기관인 평민회와 호민관(護民官) 제도도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또한 정치적 결정권을 가졌던 중산 시민층도 몰락하여 도시국가로서의 위치는 상실되고, 로마와 이탈리아의 동맹 도시들간의 전쟁인BC 1세기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 후 도시 자치권이 무너지고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전체 주민에게 부여함으로써 로마의 도시국가시대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유럽과 지중해 지역의 고대 도시국가들의 전성시대 종말한 것이지 도시국가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원전 10세기부터 사용되고 투르크 민족 등 북방 기마민족들이 중국에서 페르시아와 유럽 지역까지 개척한 실크로드(Silk Road)는 그 길로 이어진 작은 도시국가들이 활동 덕분에 가능했다. 실크로드의 도시 국가들의 유적에 대한 연구에서는 중국 뿐만 아니라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결합된 다양하고 개방적인 형태로 발전해왔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크로드는 역사를 통해서 더 다양한 교역품들을 전달하는 통로로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 문화와 뉴스가 유통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실크로드의 유럽 지역에 존재했던 베네치아 또한 도시국가의 중요한 사례이다.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기원전 10세기까지 이 곳에 살던 ‘베네티인’들에게서 유래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로마가 훈족의 침입으로 무너지던 시기에 117명이 그들만의 총족을 뽑고  훈족이 처들어올 수 없는 갯벌 지역에 터전을 잡으면서 시작된다. 베네치아는 중세와 르네상스 기간 동안 유럽의 해상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레판토 해전에 휘말리며 유럽의 중앙 정세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도시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비단, 향료, 밀을 거래하는 주요 창구였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였다.

1세기경 실크로드

고대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에 또다시 중세 도시국가들의 시대가 부활한다. 실크로드를 통해 베네치아와 같은 시대에 탄생한 중세의 도시국가로서 라구스 공화국(Respublica Ragusina)이 있다. 라구스 공화국은 현재 크로아티아의 역사적 지역인 달마티아에 14세기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던 작은 공화국이다.  나폴레옹의 정복 활동으로 1808년에 멸망할 때 총 인구는 3만명 가량이었으며, 그중 약 5000명이 라구사 시를 둘러싼 방벽 안에 살았다.

라구사 공화국의 기원은 615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바르족과 슬라브인들에 의해 로마의 도시 에피다우름(Epidaurum)이 파괴되자, 그곳의 거주민들이 대략 7세기에 라구사를 세웠다고 한다. 이 침략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일부가 북쪽으로 25Km 정도를 올라가 해안 근처의 섬에 정착하였고, 그 도시는 곧 라우사가 되었다. 그것이 슬라브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두 차례의 공격을 통해 656년에 에피다우름을 완전히 파괴시키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크로아티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이 포함된 슬라브인들이 7세기에 이곳 해안에 정착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Novgorod Republic)은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발트 해에서 우랄 산맥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점유했던 중세 루스인들의 공화국이다. 공화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존엄한 대(大) 노브고로드라고 불렀다. 공화국은 한자 동맹의 동쪽 끝으로서 번영하였다. 10세기부터 충성스러운 노브고로드 시민들에게 상당한 자유권과 특혜를 보장해 주었다. 이 때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기반이 마련된 것으로 본다. 여전히 키예프 루스의 한 지방이었지만, 노브고로드는 점점 힘을 키워 거의 독립적인 강력한 지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한자 동맹(die Hanse)은 13~17세기에 독일 북쪽과 발트 해 연안에 있는 여러 도시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연맹이다. 주로 해상 교통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동 방호와 상권 확장 등을 목적으로 했다. 1370년에 전성기를 맞은 한자동맹은 북유럽의 무역권을 지배하고 런던브뤼헤노브고로드 등에도 재외 상관을 두었다. 라인 강에서 발트 해북해에 걸쳐 수상 교통과 운수무역에 종사했으며, 갑판이 넓고 가운데가 큰 대형 선박을 이용해 북해와 발트해 방면에서 목재모피 따위와 대구 같은 수산물, 곡식과 맥주 등을 저지대와 서부 독일로 운송하고 동양의 향료와 영국의 양모나 기타 가공품을 북방으로 운반했다. 후에는 동유럽의 산업 원료를 중계하여 서유럽의 수공업자에게 공급했다. 이러한 무역 발전에 따라 해상운송의 확보와 독점을 취해 군사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림 출처

  • https://www.thinglink.com/scene/600399406797160449
  • https://en.wikipedia.org/wiki/Babylon
  • https://en.wikipedia.org/wiki/Hammurabi
  • http://imgarcade.com/1/kopshtet-e-varura-t%C3%AB-babilonis%C3%AB/
  • http://urb-1-udi-juanpablomarroquin.blogspot.kr/p/medieval.html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HES-Agora_odeum_overview.jpg
  • http://downies.com/aca/Auction317/Catalogue_076.html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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